세금 빼먹고 재산 해외로… 부유층은 재정파탄 무풍지대

전승훈특파원 입력 2015-04-16 03:00수정 2015-04-1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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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8년’ 그리스를 가다]
[‘피폐해진 삶’ 현지 르포]<중>재정 갉아먹는 주범들
국영 부두는 썰렁… 민영 부두는 북적 이달 초 찾은 그리스의 최대 항구 피레우스 내에 있는 그리스 정부가 운영하는 부두. 화물선과 컨테이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텅텅 비어 있다(사진 위쪽). 반면 바로 옆 중국 국영 해운회사 코스코 소유의 화물터미널 부두에는 컨테이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대조를 이룬다. 아테네=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아테네=전승훈 특파원
그리스가 8년이 넘도록 재정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부유층 탈세와 공공부문에 만연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이 양대 걸림돌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리스에 자금 지원을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리스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4.3%인 약 307억 달러로 추정된다. 유럽 국가 가운데 1등이다. 수도 아테네 인근 해안가와 아테네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피레우스 항구를 돌아보니 ‘그리스는 부자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라는 가난해졌지만 이를 신경 쓰지 않는 부유층은 꽤 많아 보였다.

○ 세금 내지 않는 1% 부유층

지난주 아테네 남쪽 해안가의 부유층 거주촌인 글리파다 지역을 찾았다.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리스 오나시스의 후예들 소유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해안가에는 호화 요트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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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경제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인기가수가 출연하는 그리스 전통 악기 ‘부주키’ 나이트클럽은 주말마다 새벽까지 흥청댄다. 이곳의 바와 클럽들은 탈세의 온상으로 꼽힌다. 영수증을 발행하지 않고 영업하는 것은 상식처럼 통한다. 해변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난 전직 통신회사 임원 코스타스 게오르기체스 씨(74)는 “유럽연합(EU)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가 마음대로 긴축정책을 폐지하겠다는 것은 한마디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외교와 내정에서 경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고 비아냥댔다.

그리스의 현 정부는 최근 부유층의 탈세를 막아 60억 유로(약 6조9600억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부유층들이 탈세로 쌓은 자산을 해외로 빼돌린 경우가 많아 세금 징수가 공염불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2012년에는 HSBC은행 스위스 지점에 비밀계좌를 갖고 있는 기업인과 정부 관료 등 그리스 지도층 2059명의 명단이 폭로되기도 했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 5년간 손쉬운 방법으로 재원 부족분을 조달해 왔다. 얼마를 버는지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지갑’을 가진 서민들만 쥐어짰다. 그래서 고용주보다 고용된 사람이 세금을 더 내는 황당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고용주가 피고용인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돈을 벌지만 적게 신고한 탓이다. 아리스티데스 하지스 아테네 국립대 교수는 “그리스에선 의사, 변호사보다 그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비서가 세금을 더 많이 낸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왜냐하면 ‘유리지갑’인 비서와 달리 그들은 수입을 숨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납세 거부 운동까지 일어 그 여파로 올 들어 그리스의 세금 수입은 22.5%나 줄었다. 세금 거부 운동단체 ‘지불하지 않겠다(I Don‘t Pay)!’의 바실리오스 파파도풀로스 대표(62·안과의사)는 “2400억 유로(약 302조 원)에 이르는 구제금융은 외국계 은행과 공공부문 구제에 쓰였지 서민층은 구경도 못했다”며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그리스 국민들은 지난 5년간 지불할 만큼 지불했다”며 “그리스 서민들은 세금으로 외국의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게오르게 비트로스 아테네대 경제대 교수는 “치프라스 총리가 부유층 탈세에 대해 말만 요란할 뿐 행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 해상 물동량의 4분의 1을 운송하는 세계 최대의 ‘해운대국’이면서도 760여 개의 해운업체들이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1967년 제정된 특별법에 따라 그리스 해운업체들이 법인세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해운업체에 대한 면세 혜택은 총 1750억 달러(약 204조 원)에 이른다.

치프라스 총리도 해운업체 징수를 한때 검토했다. 그가 지난 총선 때 “선사들의 해외 영업 수입에 대해 세금을 내도록 하겠다”고 공약하자 약 800개의 가문들로 구성된 그리스선주협회(UGS)는 “당장 그리스를 떠날 것”이라고 반발했다. 해운업계가 떠나면 그리스에서 고용하던 선원을 비롯해 금융, 보험, 수리 등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20만 명의 고용이 위태로워진다.

집권당인 시리자의 라니아 스비구 대변인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선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법 개정 계획은 없다. 다만 협상을 통해 선주들의 재정 기여 방안을 찾을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 ‘꿀벌통 vs 슬로모션’…피레우스 항구의 두 얼굴

그리스 경제의 또 다른 암초인 공공부문 부실을 취재하기 위해 이달 초 아테네에서 차로 1시간가량 달려 그리스 최대 규모의 피레우스 항구를 직접 가봤다. 중국의 국영 해운회사 코스코(COSCO)가 운영하는 화물터미널 부두에는 다양한 색깔의 컨테이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거대한 크레인이 화물선에 적재된 컨테이너를 육지에 내려놓으면 화물트럭과 지게차들이 마치 꿀벌통의 벌들처럼 밤낮없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반면 인근에 있는 정부 운영 부두는 너무 썰렁했다. 부두에 정박한 화물선과 컨테이너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형 크레인과 트럭들은 마치 ‘슬로모션’을 보는 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트럭들이 길게 줄 서 있는 중국 기업 운영 부두와 달리 이곳에는 ‘파시스트들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정부 운영 화물터미널 노동자들은 그리스 공공노조 소속으로 노조의 ‘보호’ 덕분에 임금도 상대적으로 더 높다. 부두 출입구 통제 직원인 바실리 사바스 씨(54)는 “중국 코스코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별도의 근로계약을 맺고 있다. 그들의 월급은 940유로에 불과하고 약간의 수당을 받고 있다. 정부 쪽 항구에서 일하는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중국의 코스코는 2009년 5억 유로를 주고 피레우스 항구 절반을 35년간 운영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후 5년 만에 이 항구에서 처리하는 화물량은 3배로 늘었다. 이 터미널에선 하루 평균 약 6000개의 컨테이너들이 하역된다.

중국 정부와 코스코는 향후 그리스 정부가 운영하는 피레우스 항구의 나머지 부분과 여객선 터미널까지 사들이고, 피레우스∼테살로니키 항구를 잇는 국영 철도망까지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푸청추 코스코 관계자는 “피레우스 항을 중동부 유럽, 남유럽, 터키, 중동, 북아프리카로 화물을 분산시키는 국제 허브 항만으로 키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시리자 정부가 올 1월 집권 이후 그리스의 국영 항구, 공항, 전력, 석유회사 등에 대한 매각 협상 백지화를 선언하면서 파장이 일었다. 외국인 투자자뿐 아니라 피레우스 항 인근 주민들까지 “항구를 되살리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크게 분노했다.

시리자 정부는 결국 2월 20일 유로그룹과의 협상에서 “향후 민영화 계획은 재검토하겠으나 이미 완료된 민영화 계약은 무효화하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디미트리 차렐라키스 아테네 국립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민영화 중단은 그리스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며 “그리스 경제가 살아나려면 공공부문에 대한 외국 투자 개방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테네=전승훈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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