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6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인데 왜 48인이 재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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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는 잘 아시다시피 33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 사법부는 3·1운동 주모자로 48인을 골라 재판에 넘겼습니다. 33인에 추가된 주모자급이 15인이라는 뜻일까요?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6일자부터 13일자까지 모두 8회로 나눠 예심결정서를 연재했습니다. 괄호 안은 예심결정서에 적힌 직책입니다. 손병희(무직) 최린(보성고등보통학교장)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권병덕(이상 천도교 도사) 이종일(천도교 월보과장) 나인협 홍기조(이상 천도교 도사) 김완규(무직) 나용환(천도교 도사) 이종훈 홍병기(이상 천도교 장로) 박준승(천도교 도사) 이승훈(기독교 장로파 장로) 박희도(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최성모(기독교 감리파 목사) 신홍식(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양전백(기독교 장로파 목사) 이명용(농업) 길선주(기독교 장로파 목사) 이갑성(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사무원) 김창준(기독교 북감리파 전도사) 이필주(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오화영(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박동완(기독교 신보사 서기) 정춘수 신석구(이상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한용운 백용성(이상 승려) 안세환(평양 기독교서원회 총무) 임규(무직) 김지환(기독교 남감리파 전도사) 최남선(서적출판업) 함태영(기독교 장로) 송진우(중앙학교장) 정노식(무직) 현상윤(중앙학교 교사) 이경섭(농업) 한병익(누룩제조판매업) 김홍규(보성사 공장감독) 김도태(무직) 박인호(천도교 대도주) 노헌용(천도교 금융관장) 김세환(삼일여학교 교사)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생도) 김원벽(연희전문학교 생도) 유여대(기독교 목사).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었지만 재판을 받은 사람은 31인이었습니다. 천도교 직무도사였던 양한묵은 감옥에서 숨졌고 기독교 목사인 김병조는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판을 받은 48인 중 민족대표를 빼고 남은 주모자급은 17인이 됩니다. 이들 중 모의단계에 참여했던 사람은 최남선 함태영 송진우 현상윤 정노식 김도태 박인호 노헌용 김세환 9인이었습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함태영은 기독교 서명자들이 체포됐을 때 가족들을 보호하기로 해 서명하지 않았죠. 송진우와 현상윤은 3·1운동 구상에 불을 당긴 뒤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해준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정노식과 김도태는 기독교 인사들의 연락에 앞장섰고요, 박인호와 노헌용은 천도교가 기독교에 5000원(약 2억5000만 원)을 지원할 때 실무자였습니다. 김세환은 3·1운동 전 충남 및 경기 수원군과 이천군에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모으다 나중에 붙잡혔죠.

이어 실행단계에서는 안세환 임규 김지환 김홍규 이경섭 한병익 강기덕 김원벽 8인이 각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안세환은 일본 도쿄에 가서 경시총감을 만나 조선독립의 이유를 전달했습니다. 임규 역시 도쿄에서 독립선언서와 의견서를 내각과 귀족원, 중의원에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도쿄에서 검거됐죠. 김지환은 기독교측이 미리 상하이로 보낸 현순 목사에게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의견서를 우송하고 돌아오다 남만주철도 백마역에서 붙잡혔습니다.

김홍규는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인쇄한 책임자였고 이경섭과 한병익은 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수안군에서 붙잡힌 천도교도였습니다. 강기덕과 김원벽은 3월 1일 당일 학생들을 동원한 지도자였죠. 특히 이 두 사람은 나흘 뒤인 3월 5일 제2의 독립시위를 주도해 남대문역 앞에서 인력거를 탄 채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 예심결정서는 고등법원이 1919년 12월 20일에 제출했습니다.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내 재판하라는 결정을 실었죠. 이에 앞서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도 예심을 끝내고 결정서를 써냈습니다. 경성지방법원은 48인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관할인 고등법원이 재판을 맡아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등법원은 48인 사건이 내란죄나 내란교사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다시 경성지방법원으로 보낸 것입니다. 경성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이 마치 핑퐁게임을 하듯 사건을 떠넘겼던 것이죠.

그렇다면 예심이라는 제도는 뭘까요? 예심은 일제 강점기에만 있었던 형사소송법 절차였습니다. 19세기 프랑스에 있던 제도를 일본이 직수입했고 조선을 강점하면서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검사가 예심을 청구하면 판사가 수사를 하고 조서를 꾸며 면소하거나 기각하거나 재판에 넘깁니다. 판사가 수사와 재판을 모두 하는 형식인 셈이죠.

그런데 예심판사는 수사를 하면서 피고인을 붙잡아 둘 수 있었습니다. 법에는 구류 기간을 2개월로 한다고 했으면서도 특별한 필요가 있으면 갱신할 수 있다고 규정해 사실상 기약 없이 가둬둘 수 있었죠. 48인을 기준으로 하면 경성지방법원이 예심절차를 진행하면서 5개월 붙잡아두었고 고등법원 역시 예심을 진행하면서 5개월 가까이 발목을 잡아두었습니다. 이 기간은 나중에 형기가 확정돼도 빼주지 않았습니다.

예심제도는 수사기능에 집중하면 피의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수단이 되고, 구속기간을 줄이고 재판에 넘길지를 엄격하게 판단하는데 초점을 맞추면 인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습니다. 양날의 칼인 셈이었죠. 그런데 일제는 이 예심제도를 조선의 사상범들에게 고통을 주는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예심을 거쳤던 ‘딸깍발이’ 이희승은 회고록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곧 시작된다던 예심은 한 달이 넘도록 기척이 없었다.··· 형사들은 우리에게 “빨리 조사를 받고 넘어가는 게 신상에 좋다”고 공갈을 쳤었다. 예심이란 몇 년 몇 달이 걸릴지 모르는 것이니 고분고분 자백을 하고 하루빨리 넘어가는 게 좋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예심에 넘겨진 14명 중 2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습니다. 33인 중 예심 기간에 목숨을 잃은 양한묵도 비슷한 처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고등법원의 예심결정서에는 법률가들이 보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물론 일제 사법부 법률가들은 아니고 변호인들이 보기에 그랬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예심결정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자세를 지닌 법률가라면 어느 진영에 소속됐건 잘못됐다고 인정할 만한 문서였습니다. 실제로 1920년 7월 13일 시작된 재판에서 이 잘못이 공식 제기돼 재판 진행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四十七人(사십칠인) - 豫審決定書(예심결정서) (一(일))···1920년4월6일7면


孫秉熙(손병희)와 그 連累(연루) 竝(병) 四十七人(사십칠인)에 對(대)한 高等法院(고등법원)의 豫審(예심)이 決定(결정)되야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에 廻附(회부)됨은 旣爲(기위) 世人(세인)이 共知(공지)하는 바이나 豫審決定書(예심결정서)의 全文(전문)은 우직 世間(세간)에 廣布(광포)되지 아니하얏기 事屬舊聞(사속구문)이나 特(특)히 此(차)를 連載(연재)하야 該(해) 公判(공판)의 進行(진행)에 注意(주의)하는 人士(인사)의 參考(참고)에 供(공)함.


決定(결정)


無職(무직)孫秉熙(손병희)六十歲(육십세)

普成高等普通學校長(보성고등보통학교장) 崔麟(최린) 四十三歲(사십삼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權東鎭(권동진) 六十歲(육십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吳世昌(오세창) 五十七歲(오십칠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林禮煥(임예환) 五十六年(오십육년)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權秉悳(권병덕) 五十三歲(오십삼세)

天道敎月報課長(천도교월보과장) 李鍾一(이종일) 六十二歲(육십이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羅仁協(나인협) 四十九歲(사십구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洪基兆(홍기조) 五十六歲(오십육세)

無職(무직) 金完圭(김완규) 四十四歲(사십사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羅龍煥(나용환) 五十七歲(오십칠세)

天道敎長老(천도교장로) 李鍾勳(이종훈) 六十五歲(육십오세)

天道敎長老(천도교장로) 洪秉箕(홍병기) 五十二歲(오십이세)

天道敎道師(천도교도사) 朴準承(박준승) 五十五歲(오십오세)

基督敎長老派長老(기독교장로파장로) (李昇薰(이승훈)) 李寅煥(이인환) 五十六歲(오십육세)

中央基督敎靑年會幹事(중앙기독교청년회간사) 朴熙道(박희도) 三十一歲(삼십일세)

基督敎北監理派牧師(기독교감리파목사) 崔聖模(최성모) 四十七歲(사십칠세)

基督敎北監理派牧師(기독교북감리파목사) 申洪植(신홍식) 四十九歲(사십구세)

基督敎長老派牧師(기독교장로파목사) 梁甸伯(양전백) 五十一歲(오십일세)

農(농) 李明龍(이명룡) 四十八歲(사십팔세)

基督敎長老派牧師(기독교장로파목사) 吉善宙(길선주) 五十二歲(오십이세)

셰브란스聯合醫學校附屬病院事務員(세브란스연합의학교부속병원사무원) 李甲成(이갑성) 三十四歲(삼십사세)

基督敎北監理派傳道師(기독교북감리파전도사) 金昌俊(김창준) 三十一歲(삼십일세)

基督敎北監理派牧師(기독교북감리파목사) 李弼柱(이필주) 五十二歲(오십이세)

基督敎南監理派牧師(기독교남감리파목사) 吳華英(오화영) 四十一歲(사십일세)

基督敎新報社書記(기독교신보사서기) 朴東完(박동완) 三十五歲(삼십오세)

基督敎南監理派牧師(기독교남감리파목사) 鄭春洙(정춘수) 四十五歲(사십오세)

基督敎南監理派牧師(기독교남감리파목사) 申錫九(신석구) 四十六歲(사십륙세)

僧侶(승려) 韓龍雲(한용운) 四十二歲(사십이세)

僧侶(승려) (白龍成(백용성)) 白相奎(백상규) 五十七歲(오십칠세)

平壤基督敎書院會總務(평양기독교서원회총무) 安世桓(안세환) 三十三歲(삼십삼세)

無職(무직) 林圭(임규) 五十六歲(오십륙세)

基督敎南監理派傳道師(기독교남감리파전도사) 金智煥(김지환) 二十九歲(이십구세)

書籍出版業(서적출판업) 崔南善(최남선) 三十一歲(삼십일세)

基督敎長老(기독교장로) 咸台永(함태영) 四十八歲(사십팔세)

中央學校校長(중앙학교교장) 宋鎭禹(송진우) 三十一歲(삼십일세)

無職(무직) 鄭魯湜(정노식) 三十歲(삼십세)

中央學校敎師(중앙학교교사) 玄相允(현상윤) 二十八歲(이십팔세)

農(농) 李景燮(이경섭) 四十五歲(사십오세)

麴製造販賣業(국제조판매업) 韓秉益(한병익) 二十九歲(이십구세)

普成社工場監督(보성사공장감독) 金弘奎(김홍규) 四十五歲(사십오세)

無職(무직) 金道泰(김도태) 二十九歲(이십구세)

天道敎大道主(천도교대도주) 朴寅浩(박인호) 六十六歲(육십육세)

天道敎金融觀長(천도교금융관장) 盧憲容(노헌용) 五十三歲(오십삼세)

水原三一女學校敎師(수원삼일여학교교사) 金世煥(김세환) 三十二歲(삼십이세)

普成法律商業專門學校生徒(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생도) 康基德(강기덕) 三十一歲(삼십일세)

延禧專門學校生徒(연희전문학교생도) 金元壁(김원벽) 二十七歲(이십칠세)

基督敎牧師(기독교목사) 劉如大(유여대) 四十二歲(사십이세)


右(우) 內亂(내란) 被告事件(피고사건)에 對(대)하야 高等法院長(고등법원장)의 命(명)을 受(수)한 豫審判事(예심판사) 朝鮮總督府判事(조선총독부판사) 楠常藏(남상장) 同(동) 永沼直方(영소직방)으로부터 提出(제출)한 訴訟記錄(소송기록) 及(급) 意見書(의견서)를 調査(조사)하야 高等法院(고등법원) 檢事長代理(검사장대리) 朝鮮總督府檢事(조선총독부검사) 草場林五郞(초장임오랑)의 意見(의견)을 聽(청)하야 決定(결정)함이 左(좌)와 如(여)함.


主文(주문)

京城地方法院(경성지방법원)을 本件(본건)의 管轄裁判所(관할재판소)로 指定(지정)함.


理由(이유)

第一(제일) 曠古(광고)의 大戰(대전)이 終局(종국)에 近(근)하야 漸次(점차) 平和(평화)의 曙光(서광)이 現(현)하랴 함에 當(당)하야 大正(대정) 七年(칠년) 一月(일월) 上旬(상순) 米國大統領(미국대통령) 「위ㄹ손」은 講和基礎條件(강화기초조건)으로 十四個條(십사개조)를 提唱(제창)한지라. 其中(기중)에 殖民地問題(식민지문제) 等(등) 主權(주권)에 關(관)한 事項(사항)은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에 從(종)하야 解決(해결)할 旨趣(지취)의 條項(조항)이 잇슬 뿐 안이라 波蘭民族(파란민족)의 獨立(독립)을 承認(승인)하랴는 旨趣(지취)와 大小國家(대소국가)의 政治上(정치상) 獨立(독립) 及(급) 領土保全(영토보전)을 擔保(담보)하기 爲(위)하야 國際聯盟(국제연맹)을 組織(조직)하는 旨趣(지취)의 條項(조항)이 잇고 其後(기후) 大正(대정) 八年(팔년) 一月(일월) 中(중) 佛國(불국) 巴里(파리)에서 講和會議(강화회의)가 開催(개최)되야 聯合各國(연합각국) 講和委員(강화위원)은 同所(동소)에 參集(참집)하야 對獨(대독) 講和條項(강화조항)을 審議(심의)하고.

米國大統領(미국대통령) 『윌손』도 亦(역) 渡佛(도불)하야 親(친)히 講和會議(강화회의)에 列(렬)하야 其(기) 主唱(주창)의 徹底(철저)에 努力(노력)하게 된 바 낭자 日韓竝合(일한병합)의 結果(결과)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을 失(실)하얏슴에 平素(평소) 不滿(불만)을 抱(포)한 天道敎(천도교) 聖師(성사) 被告(피고) 孫秉熙(손병희) 同(동) 敎徒(교도)의 有力者(유력자)인 普成高等普通學校長(보성고등보통학교장) 被告(피고) 崔麟(최린)、天道敎(천도교) 道師(도사) 被告(피고) 權東鎭(권동진)、同(동) 被告(피고) 吳世昌(오세창)은 今回(금회)의 講和會議(강화회의)는 戰亂(전란)의 結果(결과)를 處理(처리)하는 同時(동시)에 永久平和(영구평화)를 爲(위)하야 世界(세계)의 改造(개조)를 圖(도)함인즉 『윌손』의 提唱(제창)한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는 今次(금차) 戰亂(전란)의 巷(항)이 된 在(재) 歐洲各地(구주각지)의 民族(민족)뿐 아니라 世界(세계) 一般(일반)의 民族(민족)에도 또한 應用(응용)될 것임으로 此機(차기)를 乘(승)하야 朝鮮民族(조선민족)이 蹶起(궐기)하야 獨立欲望(독립욕망)의 熾烈(치열)함을 表示(표시)하야 歐米各國(구미각국)의 注視(주시)를 惹起(야기)하고 且(차) 米國大統領(미국대통령)의 意(의)를 動(동)케 할진대 朝鮮(조선)의 獨立(독립)은 『波蘭(파란)』民族(민족)의 獨立(독립)과 同一(동일)히 講和會議(강화회의)의 議題(의제)에 上(상)하야 其(기) 承認(승인)을 得(득)하겟기에 至(지)하겟고 特(특)히 其(기) 當時(당시) 在外(재외) 朝鮮人(조선인) 中(중) 임의 獨立運動(독립운동)을 試(시)하기 爲(위)하야 佛國(불국) 巴里(파리)에 渡航(도항)한 者(자)가 잇다는 風說(풍설) 及(급) 在(재) 東京(동경) 朝鮮留學生(조선유학생) 中(중) 獨立運動(독립운동)을 하는 者(자)가 잇다는 風說(풍설)이 頻頻(빈빈)히 朝鮮(조선) 內(내)에 傳播(전파)하고 又(우) 上海(상해) 在留(재류)의 朝鮮人(조선인)으로 西鮮(서선) 各(각) 地方(지방)에 來(내)하야 獨立運動(독립운동)을 宣傳(선전)한 者(자)가 잇서 此(차)로 因(인)하야 京城(경성) 其他(기타) 各地(각지)의 人心(인심)이 漸次(점차) 動擾(동요)하야 各處(각처)에 獨立運動(독립운동) 勃發(발발)의 兆(조)를 呈(정)한 時期(시기)임으로 好機(호기) 不可逸(부가일)이라 思惟(사유)하야 同年(동년) 一月(일월) 下旬(하순) 孫秉熙(손병희)의 住所(주소)에서 數回(수회) 會合(회합) 凝議(응의)한 結果(결과) 朝鮮(조선)으로 하야금 帝國(제국)의 羈絆(기반)에서 脫(탈)하야 一(일) 獨立國(독립국)을 形成(형성)케 하기를 企圖(기도)하고
47인 예심결정서 1


손병희와 그에 연루된 다른 47인에 대한 고등법원의 예심이 결정돼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된 사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예심결정서의 전문은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다 알고 있는 얘기라도 특별히 이를 연재해 이 공판 진행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참고하도록 제공함.


결정


무직 손병희 60세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43세

천도교 도사 권동진 60세

천도교 도사 오세창 57세

천도교 도사 임예환 56세

천도교 도사 권병덕 53세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 62세

천도교 도사 나인협 49세

천도교 도사 홍기조 56세

무직 김완규 44세

천도교 도사 나용환 57세

천도교 장로 이종훈 65세

천도교 장로 홍병기 52세

천도교 도사 박준승 55세

기독교 장로파 장로 (이승훈)이인환 56세

중앙기독교 청년회 간사 박희도 31세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최성모 47세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신홍식 49세

기독교 장로파 목사 양전백 51세

농업 이명용 48세

기독교 장로파 목사 길선주 52세

세브란스연합의학교 부속병원 사무원 이갑성 34세

기독교 북감리파 전도사 김창준 31세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이필주 52세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오화영 41세

기독교 신보사 서기 박동완 35세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정춘수 45세

기독교 남감리파 목사 신석구 46세

승려 한용운 42세

승려 (백용성)백상규 57세

평양기독교서원회 총무 안세환 33세

무직 임규 56세

기독교 남감리파 전도사 김지환 29세

서적출판업 최남선 31세

기독교 장로 함태영 48세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 31세

무직 정노식 30세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 28세

농업 이경섭 45세

누룩제조판매업 한병익 29세

보성사 공장감독 김홍규 45세

무직 김도태 29세

천도교 대도주 박인호 66세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 53세

수원삼일여학교 교사 김세환 32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생도 강기덕 31세

연희전문학교 생도 김원벽 27세

기독교 목사 유여대 42세


이상 내란 피고사건에 대해 고등법원장의 명을 받은 예심판사 조선총독부 판사 구스노키 쓰네조우(楠常藏), 동 나가누마 나오가타(永沼直方)가 제출한 소송기록과 의견서를 조사해 고등법원 검사장대리 조선총독부 검사 구사바 린고로(草場林五郞)의 의견을 들어 아래와 같이 결정함.


주문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함.


이유

전례 없던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가까워 점차 평화의 밝은 빛이 나타나려 함에 따라 다이쇼 7년(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은 강화기초조건으로 14개조를 제창하였다. 그중에 식민지문제 등 주권에 관한 사항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해결할 뜻을 담은 조항이 있을 뿐 아니라 폴란드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려는 뜻과 대소국가의 정치상 독립과 영토보전을 담보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을 조직하는 의도의 조항이 있고 그 후 다이쇼 8년(1919년) 1월 중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려 연합국 각국 강화위원은 이 곳에 모여 독일에 대한 강화조항을 심의하고.

미국 대통령 ‘윌슨’도 역시 프랑스로 건너가 직접 강화회의에 참석해 그 주장을 철저하게 힘써 펼쳤다. 지난번 일한병합의 결과 조선이 독립을 잃었던 것에 평소 불만을 품은 천도교 성사 피고 손병희, 같은 교도의 유력자인 보성고등보통학교장 피고 최린, 천도교 도사 피고 권동진, 같은 피고 오세창은 이번 강화회의는 제1차 대전의 결과를 처리하는 동시에 영구평화를 위해 세계의 개조를 꾀하는 것이므로 ‘윌슨’ 대통령이 외친 민족자결주의는 이번 제1차 대전의 현장이 된 유럽 각지에 있는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 일반 민족에도 또한 적용될 것이므로 이 때를 타서 조선민족이 들고 일어나 독립 욕망이 치열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유럽 각국이 주시하도록 하고 또 미국 대통령의 생각을 움직이게 해 조선의 독립을 ‘폴란드’ 민족의 독립과 마찬가지로 강화회의 의제에 올려 그 승인을 얻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그 당시 해외 조선인들 중 이미 독립운동을 시도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사람이 있다는 소문과 도쿄에 있는 조선유학생들 중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자주 조선에 알려지고 또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으로 조선 서부 각 지방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선전한 사람이 있어 이 때문에 경성 기타 각지의 인심이 점차 동요하여 각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나타난 시기이므로 좋은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같은 해 1월 하순 손병희의 자택에서 수차례 모여 신중히 논의한 결과 조선을 일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하나의 독립국을 이루게 하기를 꾀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