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6월 3일

동아일보와 떠나는 세계 불가사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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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동아일보 일요판이 ‘세계의 경이’ 첫 번째로 꼽은 경주 석굴암. 당시 기사는 석굴암의 뛰어난 작품성을 묘사한 뒤 ‘거액을 들여 석굴암을 중수한다며 도리어 훼손한 사실은 통탄할 일’이라며 일제의 무분별한 복원공사를 비판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중국의 만리장성, 로마 콜로세움, 이집트 쿠푸 왕의 피라미드? 사실 정답은 없습니다. 많은 학자와 단체, 호사가들이 나름대로 열거했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니까요. 그래도 어릴 적 친구들과 “이건 맞네, 아니네” 입씨름하면서 역사를 알아가고 견문을 넓혔던 기억은 참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정보가 훨씬 제한적이었던 1923년, 동아일보는 ‘세계의 경이’라는 제목으로 동서고금의 놀라운 보물들을 소개했습니다. 6월 3일자에 처음 선보인 일요호(일요판)를 통해섭니다. 통상 발행하던 4개면에 추가로 4면, 혹은 2면을 더한 일요판은 그 해 11월 말까지 6개월간 계속됐습니다.

동아일보는 첫 번째로 조선의 석굴암을 꼽았습니다. ‘동양 최고의 미술작품으로···석상에 손을 갖다 대면 윤기 있는 피부가 눌려 들어가는 듯하다’는 묘사가 압권입니다. 기사는 ‘총독부에서 2만 원의 거액을 들여 석굴암을 중수한다며 도리어 고적을 훼손한 사실은 내외국인 관람자가 통탄할 일’이라며 일제의 무분별한 복원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나라 잃은 시기, 석굴암은 숱한 수난을 겪었습니다. 일제는 자신들이 석굴암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과장해 선전하는가 하면 일본인들이 일부 유물을 몰래 빼내는 등 훼손이 잇따르자 석굴암을 통째로 경성으로 옮기려고도 했습니다. 총독부는 1913년부터 세 차례 석굴암을 중수(重修)했는데 이 과정에서 외벽에 시멘트를 사용하는 바람에 습기가 차고 누수 현상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결국 지금까지도 석굴암은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기 위해 유리벽으로 막힌 채 에어컨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있는 ‘피사의 사탑’. 중세 도시국가였던 피사가 사라센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불안정한 지반 탓에 몸체가 점점 기울어지는 바람에 1990년부터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현재 경사도는 약 5.5도.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 지역 아부 산 부근의 자이나교 사원 ‘델르와라’. 정교하게 조각한 흰 대리석으로 내부를 꾸며 화사함의 극치를 이룬다. 당시 동아일보는 ‘신과 인간의 조화가 아니고는 이처럼 정밀할 수 없다고 탄복하는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보로부두르 불교 유적’. 울창한 정글 속에 숨어 있었으나 1814년 이곳을 통치하던 영국인 라플즈 경에 의해 본격 발굴됐다. 구릉의 경사를 따라 쌓아올린 수많은 탑이 전체로도 탑 형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석굴암에 이어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만리장성, 인도의 자이나교 사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불교유적, 독일의 울름 대성당 등 총 13편의 ‘세계의 경이’를 연재했습니다. 특히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지구상에서 견줄 데 없는 인력을 들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인민의 고통을 추상하면 피의 장성이라 한다’며 노역에 동원된 인민의 아픔에 공감하는 표현도 썼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2일자 일요판이 ‘세상에서 제일 큰 집’이라고 소개한 미국 뉴욕의 57층짜리 ‘울워스 빌딩’. 1913년 완공돼 1930년까지 세계 최고층 건물로 군림했다. 최초의 가격파괴 상점 ‘5센트 스토어’로 큰돈을 번 프랭크 울워스가 세웠다.
여기엔 포함되지 않았지만 9월 2일자 일요판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집’도 독자의 눈길을 끌 만했습니다. ‘미국의 5전 균일상점 주인 울월트 씨가 지은 집이다. 워싱턴까지 전깃줄을 장치하고 1913년 4월 24일 윌슨 대통령이 백궁(白宮)에 앉아 전기단추를 눌러 일제히 불을 켜고···’. 미국의 ‘5센트 스토어’ 대표 울워스 씨가 뉴욕 맨해튼에 지은 빌딩 개관식을 할 때 윌슨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원격 점등 버튼을 눌러 축하했다는 내용입니다. 지상 57층, 높이 241m의 울워스 빌딩은 ‘세계 최대’였는지는 불확실하지만 1930년 ‘40 월스트리트’가 완공되기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독자와 함께 지면을 제작하고 ‘문화주의’ 사시(社是)를 구현한다는 큰 그림을 실천한 동아일보 일요판은 ‘세계의 경이’ 외에도 ‘실패인가, 성공인가-미국 금주령의 앞날’, ‘지진·해일은 어떠한 것인가’와 같은 다양한 교양기사를 실었습니다. 또 ‘동아플래시100’을 통해 소개한 적 있는 ‘백마 탄 장군 김경천’의 전쟁 경험담, 우리와도 관련이 깊었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 옥중 수기 등 장문의 기고도 소화했죠.

하지만 일요판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코너는 단편소설, 1막 각본, 동화, 시조, 신시, 동요, 서정문, 감상문 등 각종 문예작품 투고를 받아 게재한 ‘독자문단’이었습니다. 독자문단은 일요판의 뒤를 이은 ‘월요란’에서도 계속됐고, 1925년 대한민국 최초의 신춘문예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日曜號(일요호)

世界(세계)의 驚異(경이)(一·일)

朝鮮(조선)의 石窟庵(석굴암)

慶州(경주) 石窟庵(석굴암)의 佛像(불상)은 現時(현시) 東洋(동양) 最古(최고)의 美術的(미술적) 作品(작품)으로 가장 偉大(위대)한 것의 하나이라 稱(칭)한다. 新羅(신라) 三十五世(삼십오세) 景德王(경덕왕) 十年(십년)에 金大城(김대성)의 創立(창립)한 바로 海拔(해발) 一千三百(일천삼백) 尺(척)의 峻峯(준봉) 吐含山(토함산) 頂上(정상)에 在(재)하야 東海(동해)를 按(안)하엿나니 海岸(해안)까지의 사이에는 無數(무수)한 山脈(산맥)이 眼前(안전)에 屈服(굴복)하엿다. 其(기) 構造(구조)의 材料(재료)는 全部(전부) 花崗石(화강석)으로 珍奇(진기)美妙(미묘)함이 實(실)로 우리 朝鮮(조선)民族(민족)의 자랑거리다.

內部(내부)는 穹窿(궁륭)狀(상)이며 入口(입구)에 八金剛(팔금강) 仁王(인왕)과 內部(내부)의 圍壁(위벽)에 四(사) 菩薩(보살) 十大(십대) 弟子(제자) 十一面(십일면)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等(등)을 薄肉(박육) 彫刻(조각)하얏고 壁(벽)의 上部(상부)에 十個(십개) 石龕(석감)이 有(유)하며 每(매) 龕(감) 中(중)에 佛像(불상)을 置(치)하엿든 模樣(모양)이나 今(금)에는 二佛(이불)을 紛失(분실)하고 八佛(팔불)만 殘存(잔존)하얏스며 窟(굴) 內(내) 中央(중앙)에 高(고) 五尺(오척)의 蓮花臺(연화대) 上(상)에 釋迦如來(석가여래)의 坐像(좌상)을 安置(안치)하얏는대 高(고) 一丈一尺(일장일척) 餘(여)이며 釋尊(석존)의 背後(배후) 壁上(벽상)과 天蓋(천개)에는 蓮瓣(연판)의 彫刻(조각)이 잇다. 吐含山(토함산)의 西麓(서록)에 佛國寺(불국사)가 尙存(상존)하얏스며 其(기) 事蹟(사적) 中(중)에 石窟庵(석굴암)의 天蓋(천개) 三裂(삼렬)이라 云云(운운)한 것을 보면 新羅(신라)時代(시대) 以來(이래)로 破裂(파열)된 天蓋(천개)가 崩壞(붕괴)치 아님은 一(일) 奇蹟(기적)이다.

釋尊(석존)의 座臺(좌대)와 蓮臺(연대)의 間(간)에 小(소) 支柱(지주) 彫刻(조각)의 手法(수법)은 佛國寺(불국사)의 多寶塔(다보탑)과 同一(동일)한 意匠(의장)으로 崇高(숭고)尊嚴(존엄)한 感(감)을 惹起(야기)함보다 오히려 現代的(현대적)으로 人間(인간)의 肉體美(육체미)를 發揮(발휘)하얏나니 男性(남성)이 아니오 女性(여성)으로 溫柔(온유)慈悲(자비)한 性格(성격)을 表現(표현)하야 乳部(유부)의 肥滿(비만)과 手足(수족)의 柔和(유화)함은 女性(여성)이 確實(확실)하고 萬若(만약) 男性(남성)이라 하면 頗(파)히 美男子(미남자)이다. 半(반)裸體(나체)인 如來(여래)의 石像(석상)에 우리 人間(인간)의 手(수)를 觸(촉)하여도 石像(석상)의 肥膚(비부)가 壓縮(압축)이 되는 듯하다. 年前(연전)에 總督府(총독부)에서 二萬(이만)의 巨額(거액)을 費(비)하야 重修(중수)한다고 도로혀 古蹟(고적)을 汚(오)한 事實(사실)은 內外國人(내외국인)의 觀覽者(관람자)로 하야금 痛嘆(통탄)케 한다.

일요판

세계의 경이(1)

조선의 석굴암


경주 석굴암 불상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미술작품으로, 가장 위대한 것의 하나라 일컬어진다. 신라 35대 경덕왕 10년에 김대성이 건립한 것으로, 해발 1300척 준봉 토함산 정상에서 동해를 어루만지니 해안까지의 사이에는 무수한 산맥이 눈앞에 엎드려 굴복해 있다. 석굴암 구조의 재료는 모두 화강석으로, 진기하고 기이하며 미묘함이 실로 우리 조선민족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다.

가운데가 높은 반달 형상인데 입구에 8금강 인왕과 내부 주위 벽에 4보살, 10대 제자, 11면 관세음보살 등을 얇게 드러내 조각했고, 벽 위쪽에는 10개의 돌 감실이 있으며 매 감실 안에 불상을 모셨던 모양이지만 오늘날엔 불상 2개를 분실하고 8개만 잔존해 있다. 굴 내부 중앙에 높디높은 5척의 연꽃 모양의 대 위에 석가여래 좌상을 안치했는데 높이는 11척이 넘으며 석가세존의 뒷벽 위와 관 뚜껑에는 연꽃잎 조각이 있다. 토함산 서쪽 기슭에는 불국사가 아직 존재해 있으며, 그 사적 중 ‘석굴암의 관 뚜껑이 세 갈래로 찢어졌다’ 운운한 것을 보면 신라시대 이래로 파열된 관 뚜껑이 붕괴되지 않음은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석가세존의 좌대와 연꽃 모양 대 사이 작은 지주 조각의 수법은 불국사의 다보탑과 동일한 장식 도안으로, 숭고하고 존엄한 느낌을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적으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발휘한 것이다.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온유 자비한 성격을 잘 표현해 풍만한 젖가슴과 부드러운 손발은 여성이 확실하고, 만약 남성이라 하면 대단한 미남자이다. 반나체인 석가여래 석상에 우리 인간의 손을 갖다 대도 석상의 윤기 있는 피부가 눌려 들어가는 듯하다. 몇 년 전 총독부에서 2만 원의 거액을 들여 석굴암을 중수한다며 도리어 고적을 훼손한 사실은 내외국인 관람자가 통탄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