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27일

함정단속인가 본때보이기인가…연이은 월간지 엄벌의 내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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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잡지 ‘신천지’ 주간과 영업부장이 경찰에 잡혀간 지 이틀만인 1922년 11월 22일 역시 월간 ‘신생활’의 사장과 인쇄인이 붙잡혀 갔습니다. 3일 뒤에는 신생활 기자 3명이 수감됐죠.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월간지 2곳이 일제 경찰에 의해 초토화되다시피 당한 겁니다. 신천지 백대진 주간의 사연은 2020년 10월 27일자에 소개했으니까 이번에는 신생활 필화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922년 3월 창간된 신생활은 5호까지는 순간(旬刊)이었고 6호부터 월간이 됐습니다. 사장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죠. 이사 겸 주필인 김명식은 제주 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반의 논객으로 활약했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 간부였습니다. 김명식이 하나 둘 영입한 기자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이었죠.

신생활은 창간호부터 발매금지 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 6호가 발매금지됐고 4호는 압수됐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잡지의 성향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0호부터는 논조가 한층 강해졌죠. 볼셰비키 혁명과 무산계급 독재를 표나게 강조한 겁니다. 공교롭다고나 할까요. 10호 발행 직전에 신생활은 정치와 사회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 총독부가 보증금 300원씩을 받고 신생활 신천지 개벽 조선지광 등을 신문지법에 따라 발행하도록 허용했죠. 출판법으로 허가받은 잡지는 학술과 기예 기사만 실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 조치가 수상쩍었습니다. 신임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요시가 이 조치 한 달 전에 관련자들을 불러다 엄포를 내렸기 때문이죠. “지금 과격사상과 공산주의 등을 선전하는 언론이 많다. 앞으로 행정처분과 사법처분으로 나눠 처벌하겠다.” 이때까지는 못마땅한 신문이나 잡지는 삭제나 압수 발매금지 같은 행정처분만 내렸죠. 사법처분이래야 벌금형이 고작이었고요.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잡아넣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언론계를 위해 안심할 현상인가 안심치 못할 현상인가”라며 동업자들에게 조심하자고 당부했죠.

그러나 신생활은 직진했습니다. 신문지법 허가를 받고 발행한 두 번째 잡지인 11호를 ‘러시아혁명 5주년 특집호’로 꾸몄죠. ‘노국혁명 5주년 기념’과 ‘5년 전 금일을 회고함’ 기사가 문제가 됐습니다. 12호에 실은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과 ‘자유노동취지서’도 걸렸죠. 검경은 11, 12호를 발매금지하고 대대적인 수색도 벌였습니다. 이 판국에 고등법원 검사장은 한술 더 떠 “독립주의나 공산주의를 학설로만 소개해도 읽는 사람들이 선동이 되면 단속하겠다”고 협박했죠. 전체 언론계가 얼어붙을 지경이었습니다.



사장 박희도와 이사 겸 주필 김명식, 기자 신일용 유진희 등 신생활 관계자 4명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2월 27일자 3면에 '조선 초유의 사회주의 재판'으로 크게 보도했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한 언론계가 단합해 언론자유를 보장하라고 촉구했고 뜻있는 변호사들도 대거 변론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박희도 2년6개월, 김명식 2년, 신일용과 유진희 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죠. 인쇄기 1대도 몰수당했고요. 총독부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1923년 신생활을 폐간시키고 말았습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명식은 힘겨운 노역에 늑막염과 폐병이 겹쳐 죽을 지경이 됐습니다. 몸이 약했던 그가 견딜 수 없는 수감생활이었죠. 약 반년 만에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청각을 잃어 필담으로 대화해야 했고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얻었습니다. 그는 생활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저항하는 의지와 사회주의를 향한 집념은 굽히지 않았죠. 1943년 숨질 때까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여러 매체에 글을 쓰며 일제 치하의 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朝鮮(조선) 初有(초유)의 社會主義(사회주의) 裁判(재판)
新生活(신생활) 事件(사건) 第一回(제1회) 公判(공판)
작일 오젼 열시반 경성디방법원에서
야촌 재판장이 피고 륙명에 사실심문


신생활(新生活) 사건의 공판은 작일 오전 열한시부터 경성디방법원 뎨칠호 법뎡에서 야촌(野村) 재판댱과 대원(大原) 검사가 렬석하고 개뎡되엿다.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 재판으로 조선에 재판뎨도가 생긴 이후 처음 되는 일이라 하야 아츰부터 물밀듯 드리밀니는 남녀 방텽자가 수백명이나 되어 방텽석은 만원이 되엿다. 재판댱으로부터 먼저 피고 일동에 대하야 전례대로 주소 씨명 직업을 뭇고 그 다음 대원 검사가 신문지법 위반 밋 뎨령 위반에 대한 사건의 심리를 구한다고 안즈니 먼저 박희도(朴熙道) 씨부터 심리하기 시작하엿다.

社長(사장) 朴熙道(박희도) 氏(씨)
개뎡 벽두의 심문


박희도 씨부터 시작하야 해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경성 연희전문학교(廷禧專門學校)에서 일년 공부하얏는가.
그럿소.
전에 처벌된 일은 무슨 일인가.
대정 팔년에 이러난 조선독립운동 때에 선언서에 서명한 까닭으로 처벌되엿소.
복역 출옥 후에는 무엇을 하엿는가.
『신생활』이란 잡지를 경영하얏는대 여러 친고 중 혹은 금전으로 혹은 노력으로 후원을 바다 설립하엿소.
언제부터 설립하엿는가.
금년 일월부터이요.
피고는 사댱인가.
그럿소.
전에는 서양사람이 사댱이다가 중간에 변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발행인이 서양인이든 것을 중가에 내 일홈으로 변하얏슬 뿐이요. 사댱은 처음부터 나이요.
십월 사일에 신문지법으로 허가를 맛고 매 주일마다 한 번식 토요일마다 발행하게 하고 긔자는 김명식(金明植) 유진히(兪鎭熙) 신일용(辛日鎔) 리성태(李星泰) 정백(鄭栢) 다섯 사람인가. 처음 설립할 때는 김명식에게 권유를 바닷는가.
리병조(李秉祚) 김원벽과 상의하고 김명식을 리병조의 소개로 서로 맛나게 된 것이요.

資本(자본)의 出處(출처)와
경영을 변경한 리유

그 다음 잡지 경영에 대한 자본 내인 것을 무르매 여러 사람이 내인 액수와 리승준(李承駿) 씨가 일만오천 원을 내이어 다른 설비를 하고 인쇄소를 일만삼천 원에 계약하야 팔천 원만 치르고 그 남어지는 아즉 치르지 못하얏단 말을 하고
피고의 일홈으로 신문지법으로 변한 리유는 무엇인가.
첫재는 조선인의 잡지를 외국인의 일홈으로 행함이 불가하고 둘재는 서양인의 명의로라도 정치시사를 쓸 수가 업슴으로 내 일홈으로 명의를 변경하야 신문지에 의하야 발행의 허가를 마튼 것이요.
사댱으로 봉급을 밧는가.
생활비를 바들 뿐이오.
몃々의 경영인가.
출자한 사람과 나와 김명식과 김원벽 네 사람이요.
그 외 긔자는 엇지하는가.
월급을 주오.
김명식은 단순한 긔자가 아니라 경영자인가.
신생활사 리사이요. 수필긔자이오.
신일용 유진희는 엇지하야 드러온 것인가.
긔자의 자각이 잇스닛가 드러왓소.
누구의 소개로 드러왓는가.
김명식의 소개로 드러왓소.
신생활사가 생긴 이후로는 별로 리익을 보지 못하얏는가. 리익을 보지 못하드래도 장래 리익을 보려고 그리한 것인가.
장래의 여망이 잇슴으로 손해를 보드래도 관계치 안소.
신생활사는 견지동에 잇지.
견지동 인쇄소 일부분을 사무소로 쓰오.
인쇄소 토디 가옥은 산 것인가.
세로 드럿소.

共産黨(공산당)과 關係(관계) 如何(여하)
공산당과는 아모 관계도 업고
공산주의 긔사도 자긔는 몰나

피고 가택을 수색할 때에 국제공산당선언서(國際共産黨宣言書) 국제공산당헌법(國際共産黨憲法)과 가입조례(加入條例) 무산당청년회 뎨이차 대표회에서 결뎡한 것과 공산당 독본은 어대서 난 것인가.
내 집에는 그런 것이 한 권도 업섯소.
피고는 공산당에 관계되는 사람과 관계 왕래하지 안는가.
그런 일은 전혀 업소.
김명식은 이전부터 공산주의를 가지고 공산주의를 고취하려고 하든 터인대 긔자될 때에 무슨 그런 일에 대한 말이 업섯는가.
그런 말 업섯소.
김명식 등이 최팔용(崔八鏞)이란 사람에게서 공산당 선전비를 바닷다는 말이 잇셧는가.
그런 풍설이 잇섯소.
그런 소문을 듯고도 김명식을 신생활사에 둔 것은 공산주의를 인뎡함이 아닌가.
김명식 군이 드러올 때에 그런 말도 업섯거니와 그런 말은 당초에 밋지 아니하오.
김명식에게 그 일을 무러본 일이 잇는가.
그런 말은 당초에 족히 취신 取信할 것이 못됨으로 뭇지도 아니하얏소.
공산주의를 김명식이가 잡지에 여러 번 쓸 때에 잡지 경영상 곤난이라고 주의식힌 일이 잇는가.
경영 곤난도 잇스려니와 글을 평범하게 하라는 헙의는 잇셧스나 공산주의 선전을 말나 한 일은 업셧소.
창간 이래 여러 번 발매금지가 되얏슬 뿐 아니라 십일호 십이호는 로서아 공산주의를 선전한 일이 만흐니 로서아 공산당과 무슨 관계가 잇는가.
아모 관계가 업소.
편집인의 책임으로 일일이 원고를 보와서 발행함인가.
긔자가 쓰는 대로 자유로 할 뿐이요. 간섭하지 안소.
십일호에 쓰인 사실은 전부 피고가 보고 한 것인가.
십일호는 고사하고 신생활은 창간 이래 긔자가 자유로 쓴 것이요. 결코 이것은 긔재하여야 한다든지 긔재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지는 아니하엿소.
보지만 아니하엿지 편집은 한 것인가.
긔자들이 각々 써서 가지고 와서 편집한 것이오.
피고는 검사국에서 십이호는 발매 전에 보고 발송하얏고 십일호는 편집할 때에 보고 발행하엿다고 말하지 아니하엿는가.
그런 말은 한 일이 업소. 십일호는 내가 려행 중에 발행된 것이닛가 나는 모르고 십이호는 내가 발행될 때에 한 번 볼 뿐이요.
로서아혁명 오주년 긔념이란 글은 누가 쎳는가.
내가 려행 중 업섯스닛가 모르겟소.
오년전(五年前) 회고(囘顧)는 누가 쓴 것인가.
신일용의 서명이 잇는대 자세 모르나 서명이 잇스면 그 사람이 쓴 것이겟지요.
십일호는 몃 부를 발간하엿는가.
압수되엿슴으로 뎡확한 부수를 모르오.
언제든지 사오쳔부식 박히는가.
압수 아니할 때는 그러케 박이오.
그 반포는 영업부댱이 마타하는가. 그럿소.
영업부댱 리경호의 말이 사쳔부를 발행하야 모다 보냇다 하니 엇던가.
그러면 그 말이 맛겟지요.
십이호의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진술이라는 것은 누가 쓴 것인가.
모르오.
십이호는 몃 부가 인쇄되엿는가.
인쇄 중 압수되여 불과 수백부에 압수되엿소.
십일호 발행될 때 어대 잇섯는가. 해주(海州)에 갓섯소.

勞働大會(노동대회)와 關係(관계)
아모 상관 업다

피고는 로동대회와 자유로동조합과 무슨 관계가 잇는가. 관계 업소. 자유로동조합 취지서가 신생활에 긔재된 것은 무슨 관계로 긔재됨인가. 로동대회나 로동자조합에는 김명식과 신일용이 출석하엿는대 그것을 몰낫는가. 몰낫소. 이로써 박희도 씨에 대한 심문은 맛치고 김명식 씨를 심문케 되얏다.

『社會主義(사회주의)에 賛成(찬성)』
선젼비 먹엇다는 말은 허셜
침착한 김명식 씨 답변 내용

그 다음 김명식 씨를 심리하기 시작하엿다. 씨는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에 출생하야 향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간 후 고심참담하야 조도뎐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政治經濟科)를 졸업하엿노라고 씨 의 다감다한한 학창생활을 말하고 그 다음 조선에 건너온 후 동아일보(東亞日報) 긔자(記者)를 다니다가 중도에 사정으로 나와서 조선일보에 입사 권유를 바닷스나 조선일보 경영자 송병준이 세상사람에게 원망을 밧는 사람이닛가 그런 사람 아래에는 입사하지 아니하겟다는 조건으로 입사를 거절하엿다는 말이 잇슨 후
피고는 최팔용에게서 공산선전비를 바닷다는 말이 잇스니 엇던가.
그것은 전연 무근한 말이라. 족히 취신할 것이 못되오.
피고는 흥농회(興農會) 회원(會員)인가. 피고는 최팔용에게 돈을 바닷슬 뿐 아니라 그 후 또 달나다가 거절되엿단 말이 잇스니 엇던가.
전혀 업는 말이오.
피고는 공산주의를 찬성하는 사람인가.
검사국에서부터 검사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하야 공산주의 々々々々라 말하나 나는 특히 『맑스』의 사상에 공명하야 연구하고 찬성하오. 그럼으로 『맑스』의 사상으로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가튼 줄 아오.
엇지하야 『맑스』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얏는가.
이 때 피고는 잠간 우스며 그런 사상의 책도 보고 그럭저럭하야 『맑스』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엿소.
피고는 신생활사에 드러가기 전부터 사회주의를 연구하엿는가.
내가 동아일보에 잇슬 때부터 다소 그 방면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엿소.
편집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검사국에서는 나는 책임자에 대한 말을 할 때에 형식상 책임자 박희도 씨인 것을 주장하얏스나 실상은 긔자 각 개인이 글을 써서 편집한 것이오.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이라는 글을 긔재할 때에 피고가 보고 긔재하지 아니하얏는가.
보지 아니하엿소.
자유로동조합 취지서는 누가 긔재하얏는가.
김사민(金思民)의 부탁으로 내가 긔재하엿소.
여럿이서 보고 긔재하지 아니하얏는가.
보히지 안코 긔재하엿소.
그 다음은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니는 자유로동조합 발긔회에 자긔가 참석하엿다는 말과 자유로동조합 취지서는 그 글이 난 후 이주간이나 지나서 긔재하엿고 또는 그 후 다른 신문에까지 긔재된 것이닛가 조곰도 상관이 업다는 말로 답변을 맛치엇다(오후 한시반=이하는 명일에)

傍聽禁止(방청금지)
대개 사실을 심리 후에
공안 방해로 방텽 금지

신생활사건 공판은 오후 세시 삼십이분에 피고 륙명에 대한 대톄의 심리를 맛치고 재판댱은 공안에 방해될 념려가 잇다 하야 차후로는 방텽 금지를 선언하얏슴으로 보통 방텽인이나 신문긔자까지 모다 퇴뎡하얏더라.

傍聽券(방청권)을 得(득)코자
아츰부터 열광한
오륙백명의 군중

조선에서 처음 열니는 사회주의자 공판이라 하야 작일에는 겨울바람이 살을 어이는 아츰 일곱시부터 재판소 압흐로 드리밀니는 군중이 무려 오륙백명이라. 수부구(受付口) 압흔 대혼잡을 이루엇다. 방텽권을 난호아 주든 서긔도 밋처 난호아 주지 못하야 뎡뎡(廷丁) 사오명을 식히어 두 줄로 행렬을 지어서 교부코자 하엿스나 열광한 군중은 행렬을 정돈하지 아니하고 금시에 네 줄 다섯 줄이 되여 실상 먼저 오고도 방텽권을 엇지 못한 사람이 만앗더라.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
신생활 사건 제1회 공판
전날 오전 10시반 경성지방법원에서
노무라 재판장이 피고 6명에게 사실심문


신생활 사건의 공판은 전날 오전 11시부터 경성지방법원 제7회 법정에서 노무라 재판장과 오하라 검사가 자리에 앉자 개정했다. 사회주의자 재판은 조선에 재판제도가 생긴 이후 처음이라고 하여 아침부터 물밀 듯 들이밀리는 남녀 방청객이 수백 명이나 되어 방청석은 만원이 되었다. 재판장은 피고 일동에 대하여 전례대로 주소 성명 직업을 묻고 그 다음 오하라 검사가 신문지법 위반과 제령 위반에 대한 사건의 심리를 요구한다고 말한 뒤 앉으니 먼저 박희도 씨부터 심리하기 시작하였다.

사장 박희도 씨
개정 벽두의 심문
(박희도 씨부터 시작하여)

―해주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경성 연희전문학교에서 일 년 공부하였나?
“그렇소.”
―전에 처벌받은 일은 무엇 때문이었나?
“1919년 일어난 조선독립운동 때 선언서에 서명한 까닭으로 처벌받았소.”
―출옥 후에는 무엇을 하였나?
“『신생활』이라는 잡지를 경영하였소. 여러 친구들의 돈이나 노력을 후원받아 설립하였소.”
―언제 설립하였나?
“올해 1월부터였소.”
―피고는 사장인가?
“그렇소.”
―전에는 서양인이 사장이었다가 중간에 바뀐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발행인이 서양인이던 것을 중간에 내 이름으로 바꿨을 뿐이오. 사장은 처음부터 나였소.”
―10월 4일에 신문지법으로 허가를 받고 매 주일마다 한 번씩 토요일마다 발행하도록 했고 기자는 김명식 유진희 신일용 이성태 정백 다섯 명인가? 처음 설립할 때는 김명식에게 권유를 받았나?
“이병조 김원벽과 상의하고 김명식을 이병조의 소개를 서로 만나게 된 것이오.”

자본의 출처와
경영을 변경한 이유

그 다음 잡지 경영을 위한 자본 유치에 관해 묻자 여러 사람이 낸 액수와 이증순 씨가 1만5000원을 내 다른 설비를 갖추고 인쇄소를 1만3000원에 계약하여 8000원만 치르고 그 나머지는 아직 치르지 못하였다고 답변하였다.
―신문지법 기준에 따라 피고의 이름으로 변경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조선인의 잡지를 외국인 이름으로 발행하는 것이 옳지 않고 둘째는 서양인의 이름이라도 정치 시사를 쓸 수가 없어서 내 이름으로 명의로 변경하여 신문지로 발행 허가를 받은 것이오.”
―사장으로 봉급을 받는가?
“생활비를 받을 뿐이오.”
―몇 명이 경영하나?
“출자한 사람과 나, 김명식, 김원벽 네 사람이오.”
―그 외 기자는 어떻게 하는가?
“월급을 지급하오.”
―김명식은 단순한 기자가 아니라 경영자인가?
“신생활사 이사이고 수필기자요.”
―신일용 유진희는 왜 입사하였나?
“기자로서 자각이 있으니까 들어왔소.”
―누구 소개로 입사하였나?
“김명식의 소개로 들어왔소.”
―신생활사가 생긴 이후로는 별로 이익을 보지 못하였나? 이익을 보지 못하더라도 장래 이익을 보려고 운영한 것인가?
“장래의 희망이 있으므로 손해를 보더라도 상관하지 않소.”
―신생활사는 견지동에 있지?
“견지동 인쇄소 일부분을 사무실로 쓰고 있소.”
―인쇄소 토지와 건물을 매입한 것인가?
“임차해 들어온 것이오.”

공산당과 관계 여부
공산당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공산주의 기사도 자신은 몰라

―피고 가택을 수색할 때 국제공산당선언서 국제공산당헌법과 가입조례 무산당청년회 제2차 대표회에서 결정한 것과 공산당 독본은 어디서 난 것인가?
“내 집에는 그런 것이 한 권도 없었소.”
―피고는 공산당에 관계되는 사람과 관계 왕래하지 않는가?
“그런 일은 전혀 없소.”
―김명식은 이전부터 공산주의를 품고 공산주의를 고취하려고 하던 터인데 기자될 때 무슨 그런 일에 대한 말이 없었나?
“그런 말 없었소.”
―김명식 등이 최팔용이란 사람에게서 공산당 선전비를 받았다는 말이 있었나?
“그런 소문이 있었소.”
―그런 소문을 듣고도 김명식을 신생활사에 둔 것은 공산주의를 인정한 것이 아닌가?
“김명식 씨가 입사할 때 그런 말도 없었던데다 그런 말은 당초에 믿지 않소.”
―김명식에게 그 일을 물어본 일이 있나?
“그런 말은 애초에 충분히 믿을 것이 못 되므로 묻지도 않았소.”
―공산주의를 김명식이 잡지에 여러 번 쓸 때에 잡지 경영상 곤란하다고 주의를 준 일이 있나?
“경영 곤란도 있겠지만 글을 평범하게 하라는 협의는 있었지만 공산주의 선전을 말라고 한 일은 없었소.”
―창간 이래 여러 번 발매금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11호 12호는 러시아 공산주의를 선전한 글이 많으니 러시아 공산당과 무슨 관계가 있나?
“아무 관계가 없소.”
―편집인의 책임으로 일일이 원고를 읽고 발행하는가?
“기자가 쓰는 대로 자유롭게 할 뿐이오. 간섭하지 않소”
―11호에 쓴 사실은 모두 피고가 읽고 낸 것인가?
“11호는 고사하고 신생활은 창간 이래 기자가 자유롭게 써왔소. 결코 이것은 써야 한다든지 쓰면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소.”
―읽지만 않았지 편집은 한 것인가?
“기자들이 각각 써서 가지고 와서 편집한 것이오.”
―피고는 검사의 조사를 받을 때 12호는 발매 전에 보고 발송하였고 11호는 편집할 때 보고 발행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소. 11호는 내가 여행 중에 발행된 것이니까 나는 모르고 12호는 내가 발행될 때에 한 번 보았을 뿐이오.”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이란 글은 누가 썼나?
“내가 여행 중이라 없었으니까 모르겠소.”
―5년 전 회고는 누가 쓴 것인가?
“자세히는 모르지만 신일용의 기명이 있으니까 기명이 있으면 그 사람이 쓴 것이겠지요.”
―11호는 몇 부를 발간하였나?
“압수되었으니 정확한 부수를 모르겠소.”
―언제나 4000~5000부를 인쇄하는가?
“압수되지 않을 때는 그 정도로 찍소.”
―배포는 영업부장이 담당하는가?
“그렇소.”
―영업부장 이경호의 말이 4000부를 발행하여 모두 배포하였다고 하니 어떠한가?
“그러면 그 말이 맞겠지요.”
―12호의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진술이라는 것은 누가 쓴 것인가?
“모르오.”
―12호는 몇 부가 인쇄되었나?
“인쇄 중 압수되어 불과 수백 부가 압수되었소.”
―11호 발행될 때 어디 있었는가?
“해주에 갔었소.”

노동대회와 관계
아무 상관 없다

―피고는 노동대회와 자유노동조합과 무슨 관계가 있나?
“관계 없소.”
―자유노동조합 취지서가 신생활에 기재된 것은 무슨 관계로 그렇게 된 것인가? 노동대회나 노동자조합에는 김명식과 신일용이 참석하였는데 그것을 몰랐나?
“몰랐소.”
이것으로 박희도 씨에 대한 심문을 끝내고 김명식 씨를 심문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에 찬성』
선전비 받았다는 말을 허위
침착한 김명식 씨 답변 내용

그 다음 김명식 씨를 심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전라남도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간 뒤 아주 어렵게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노라고 느낌도 많고 한도 많았던 학창생활을 말하였다. 이어 조선에 돌아온 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중도에 사정이 있어서 나와 조선일보에 입사 권유를 받았으나 조선일보 경영자 송병준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 아래에는 입사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입사를 거절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피고는 최팔용에게서 공산 선전비를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가?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라 충분히 믿을 것이 못 되오.”
―피고는 흥농회 회원인가? 피고는 최팔용에게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뒤 또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가?
“전혀 없는 말이오.”
―피고는 공산주의를 찬성하는 사람인가?
“검사 조사 때부터 검사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혼동하여 공산주의 공산주의라고 말하지만 나는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여 연구하고 찬성하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같은 줄로 아오.”
―어떤 이유로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었나?
(이때 피고는 잠깐 웃으며) “그런 사상의 책도 보고 그럭저럭하여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게 되었소.”
―피고는 신생활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는가?
“내가 동아일보에 있을 때부터 다소 그 방면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였소.”
―편집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검사국에서 나는 책임자에 대한 진술을 할 때에 형식상 책임자가 박희도 씨라고 주장하였으나 사실은 기자 각 개인이 글을 써서 편집한 것이오.”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이라는 글을 실을 때 피고가 보고 싣지 않았는가?
“보지 않았소.”
―자유노동조합 취지서는 누가 실었는가?
“김사민의 부탁으로 내가 실었소.”
―여러 명이 보고 싣지 않았는가?
“보여주지 않고 실었소.”
이어 각황사에서 열리는 자유노동조합 발기회에 참석하였다고 말하고 자유노동조합 취지서는 그 글이 나온 뒤 2주일이나 지나서 실었고 또 그 뒤 다른 신문에까지 실린 것이니까 조금도 문제가 없다는 말로 답변을 마쳤다(오후 1시반=이하는 내일로)

방청금지
대개 사실을 심리한 뒤에
공안 방해로 방청 금지

신생활사건 공판은 오후 3시 32분에 피고 6명에 대한 대체적인 심리를 마치고 재판장은 공안에 방해될 염려가 있다고 하여 이후로는 방청 금지를 선언하였으므로 일반 방청인이나 신문기자까지 모두 퇴정하였다.

방청권을 얻으려고
아침부터 열광한
500~600명의 군중

조선에서 처음 열리는 사회주의자 공판이라고 하여 전날에는 겨울바람이 살을 에이는 아침 7시부터 재판소 앞으로 들이밀리는 군중이 무려 500~600명이었다. 접수창구 앞은 대혼잡을 이루었다. 방청권을 나눠 주던 서기도 미처 나눠주지 못해서 법원 사환 4, 5명을 시켜서 두 줄로 줄을 지어 배부하려고 하였으나 열광한 군중은 줄을 정돈하지 않고 금세 네 줄 다섯 줄이 되어 실은 먼저 오고도 방청권을 얻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