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7월 12일

자, 보시오! 이 분들이 3·1운동 지도자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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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면은 ‘읽는’ 신문이 아니라 ‘보는’ 신문이었습니다. 전체 지면의 3분의 2를 얼굴사진이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로 9단짜기를 시도해 위에서 여섯 번째 단까지는 보는 사진을 배치하고 그 밑에 3단에 읽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봐도 아주 파격적이고 대담한 편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지면은 3·1운동 지도자들의 재판이 시작되는 날을 맞아 지도자 48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사진을 담았습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년 넘게 지났지만 많은 조선인들은 48인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했다더라, 예심결정서에는 3·1운동을 사전에 기획하거나 학생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15인이나 된다더라, 정도만 알았죠.

당시는 지금처럼 TV도, 스마트폰도 없었고 기념사진도 아주 드문데다 스냅사진은 이제 막 등장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지, 선후배 등을 제외하고 이 지도자들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죠. 그래서 당시 동아일보 편집자들은 조선인들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렇게 혁신적인 지면을 구상했습니다. 글자만 실을 때는 지면이 세로 12단짜기였지만 사진을 싣게 되면서 9단짜기를 과감하게 적용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죠.

기자들이 48인의 사진을 하나하나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법합니다. 두루마기 입은 사람부터 양복에 넥타이 차림인 사람, 갓 쓴 사람에, 학사모 쓴 사람까지 제각각인 모습이 사진이 귀하던 100년 전의 실정을 잘 말해줍니다. 이 지면에 실을 사진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여 얼마나 먼 길을 오갔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진은 1920년 4월 6일자에 실렸던 예심결정서의 이름순으로 배치했습니다. 오른쪽 맨 위 손병희를 시작으로 왼쪽으로 이어지는 순서입니다. 한 단씩 아래로 내려와 같은 순서로 실었죠. 사진 아래 2단 크기 기사로 이름을 별도로 추가했지만 일일이 대조해서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고하시라고 사진마다 직접 이름을 넣은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나 할까요? 48인 얼굴사진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이중 한용운 사진이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얻으려고 동분서주하던 스물두 살 청년기자 유광렬은 한용운 사진 한 장을 끝까지 구하지 못했습니다. 한용운은 독립운동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는지 사진 찍는 일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 구하기가 더 힘들었겠죠.

쩔쩔매던 유광렬이 보기 딱했던지 학예·미술 담당기자 고희동이 사진 하나를 슬쩍 건네줍니다. 고희동은 5년 과정의 도쿄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였습니다. 반색하며 ‘한용운 사진이냐’고 유광렬이 묻는 말에 고희동은 그저 웃기만 했다죠.

(왼쪽) 1920년 7월 12일 3면의 한용운 사진
(오른쪽) 1920년 서대문감옥에 갇힌 한용운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렇게 해서 지면에 실은 사진 속 한용운과 실제 한용운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릅니다. 지면 속 사진과 서대문감옥에서 찍은 한용운 사진을 비교하면 차이를 알 수 있죠. 화가인 고희동이 비슷한 윤곽의 사진을 골라 손질까지 했으니까 아주 딴판은 아니었을 겁니다. 유광렬 본인은 그로부터 50년 가까이 흐른 1969년에 “그때 신문의 한용운 사진은 가짜였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서전 ‘기자 반세기’에서 털어놓은 것이죠.

48인 얼굴사진 아래에 실린 ‘금일이 대공판’ 기사는 역사적인 의미에 비춰볼 때 길지는 않습니다. 3·1운동 후 붙잡힌 48인이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더위와 추위를 겪은 지 16개월 12일 만에 드디어 재판이 열려 그 결과가 주목된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4개 경찰서에서 동원한 일제 경찰 100여 명이 법정을 철통같이 둘러싸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또 손병희가 뇌출혈 후유증이 심해 법정에는 나오지 못한다는 내용은 별도 제목을 붙여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今日(금일)이 大公判(대공판)
만인의 시션이 모히는 곳에
당국의 처치는 엇더할지

작년 삼월 일일에 탑골공원에서 『만세―』 소래가 이러나며 명월관 지뎜 뎨일호실에서는 조선 민족대표자 삼십삼인이 모히어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선언한 후로 손병희 외 사십칠인은 서대문감옥 돌벽늘 구들에서 답답한 더위와 아푼 치위를 근격지 열여섯 달과 열이틀 만에 오날 오젼 팔시에야 감옥에 매인 그네의 운명을 결단하는 뎨일막이 열니게 되얏다.

이에 세상사람의 시선은 모다 이네의 재판이 엇지나 될가 하는데로 모하엇고 또한 조선이 생긴 후로 처음 열니는 공판이오 더욱히 사건이 중대함으로 당국자의 주의도 크려니와 장차 하회가 엇지 될는지 우리는 매우 주목치 아니치 못하겟스며 오날 뎡동 텰도부 아래층의 법뎡에서는 다음 표와 가튼 순서로 사십팔인을 안게 한다더라.

韓秉益(한병익) 安世桓(안세환) 李甲成(이갑성) 洪秉箕(홍병기) 吳世昌(오세창)

金弘奎(김홍규) 林   圭(임  규) 金昌俊(김창준) 朴準承(박준승) 林禮煥(임예환) 辯護人席(변호인석)

金道泰(김도태) 金智煥(김지환) 李弼桂(이필규) 李寅煥(이인환) 權秉悳(권병덕)

朴寅浩(박인호) 崔南善(최남선) 吳華英(오화영) 朴熙道(박희도) 李鍾一(이종일) 孫秉熙(손병희)

盧憲容(노헌용) 咸台永(함태영) 朴東完(박동완) 崔聖模(최성모) 羅仁協(나인협) 崔  麟(최   린)

金世煥(김세환) 宋鎭禹(송진우) 鄭春洙(정춘수) 申洪植(신홍식) 洪基兆(홍기조) 權東鎭(권동진)

康基德(강기덕) 鄭魯湜(정노식) 申錫九(신석구) 梁甸伯(양전백) 金完圭(김완규)

金元壁(김원벽) 玄相允(현상윤) 韓龍雲(한용운) 李明龍(이명룡) 羅龍煥(나용환) 辯護人席(변호인석)

劉如大(유여대) 李景燮(이경섭) 白相奎(백상규) 吉善宙(길선주) 李鍾勳(이종훈)

大公判(대공판)과 엄즁한 경계

금일 사십팔인 공판의 취톄를 맛흔 서대문경찰서는 작일부터 준비에 분망한대 룡산경찰서에서 경부 이하 이십여명과 종로 본뎡 량경찰서에서 각각 경관 이십여명과 뎨삼부 순사가 다수히 응원할 터이며 서대문경찰서는

서원 젼부가 출동하야 금일 아참 여섯시 새벽젼부터 두 대로 나누어 한 대는 서대문경찰서에 모히고 한 대는 서대문파출소에 모히어 제반 정리를 할 터이며 당일 길거리에 느러설 경관은 네 경찰서를 합하야 백여 명의 경관이 츌동할 터인즉 법뎡계로는 젼무후무한 대경게를 할 터이라. 대한문에서 뎡동으로 드러가는 골목과 서대문통에서 뎡동으로 드러가는 골목에는 긔마순사가 느러서서 경계할 터이요 뎡동 골목에는 거리□ 붉은 모자와 칼자루를 번적이는 경관이 느러섯스며 법뎡 내외도 수십명의 경관이 느러서서 경계하더라.

孫秉熙(손병희)는 缺席(결석)
신병으로 인하야

오날이 사십팔인의 공판인 것은 별보와 갓거니와 손병희는 오래동안 신음하든 신병이 아직도 낫지 못하고 지금도 병감에 잇슴으로 오날 법뎡에는 츌두치 못한다더라.

오늘이 대공판
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당국의 판단은 어떠할 것인가

작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 소리가 일어났다. 명월관 지점 제1호실에서는 조선민족대표자 33인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손병희 외 47인은 서대문감옥 돌벽돌 구들에서 답답한 더위와 아픈 추위를 겪은 지 16개월과 12일 만에 오늘 오전 8시에야 감옥에 매인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제1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들의 재판이 어떻게 될까 하는 데로 모였다. 또 조선이 생긴 뒤 처음 열리는 재판이고 더구나 사건이 중대해 당국자의 관심도 크므로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우리는 매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정동 철도부 아래층의 법정에서는 다음 표와 같은 순서로 48인을 앉게 한다고 한다.

한병익 안세환 이갑성 홍병기 오세창
김홍규 임   규 김창준 박준승 임예환 변호인석
김도태 김지환 이필규 이인환 권병덕

박인호 최남선 오화영 박희도 이종일 손병희
노헌용 함태영 박동완 최성모 나인협 최   린
김세환 송진우 정춘수 신홍식 홍기조 권동진

강기덕 정노식 신석구 양전백 김완규
김원벽 현상윤 한용운 이명룡 나용환 변호인석
유여대 이경섭 백상규 길선주 이종훈

대공판과
엄중한 경계

오늘 48인 재판의 질서유지를 맡은 서대문경찰서는 어제부터 준비에 바쁘다. 용산경찰서에서 경부 이하 20여 명과 종로 본정 두 경찰서에서 각각 경관 20여 명과 제3부 순사가 다수 지원하기로 했다.

서대문경찰서는 직원 모두가 출동해 오늘 오전 6시 새벽 전부터 2대로 나누어 1대는 서대문파출소에 모여 모든 정리를 할 예정이다. 당일 길거리에 배치될 경관은 4개 경찰서를 합해 100여 명의 경관이 출동하기로 해 법정 관련으로는 전무후무한 대대적 경계를 하겠다.

대한문에서 정동으로 들어가는 골목과 서대문통에서 정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기마순사가 배치돼 경계하겠다. 정동 골목에는 거리마다 붉은 모자와 칼자루를 번쩍이는 경관이 배치됐으며 법정 안팎으로도 수십 명의 경관이 줄지어서 경계한다고 한다.

손병희는 결석
신병으로 인해

오늘이 48인의 공판인 것은 별도 기사와 같지만 손병희는 오랫동안 신음하던 신병이 아직도 낫지 않아 지금도 병감에서 있기 때문에 오늘 법정에는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