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6월 6일

여동생 거꾸로 매달고 때리고…내 가슴이 으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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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참 건강했어요. 감기 한 번 걸린 일 없었고 밥 한 번 체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주도 비상하다고 선생들이 칭찬까지 했습니다.”


김마리아의 작은 언니 김미렴은 동생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1920년 5월 말 대구의 인터뷰 자리였죠. 원래 동아일보 기자는 김마리아를 직접 만나려고 출장을 갔습니다. 하지만 두 친언니와 지인 등 3명을 만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6월 2일자부터 5회에 걸쳐 이 내용을 연재했습니다. 이중 5회가 친언니들이 말하는 김마리아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작은 언니 말처럼 김마리아는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활달했던 모양입니다. 지인이 “천성이 팔팔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집안이 넉넉해 구김살 없이 자랐고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가 마리아를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지어주었다죠. 그러나 세 살 때 아버지가, 열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기사에서 큰 언니 김함라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님까지 세상을 떠나셨다”고 말한 것은 착각인 듯합니다.

어머니는 “세 자매 중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유학을 시켜라”라고 유언합니다. 다섯 살, 세 살 손위였던 두 언니는 이 말씀을 뼈에 새겨 뒷바라지했던 든든한 울타리였죠. 세 자매는 어머니를 여읜 이듬해인 1906년 두 삼촌을 따라 고향 황해도 장연을 떠나 한성에서 신교육을 받습니다. 둘째 삼촌 김필순은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쫓기면서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영영 이별합니다.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였죠.

<좌> 1920년 6월 6일자 기사에 실린 김마리아 얼굴사진. <우> 1921년 8월 5일자 상하이 탈출 기사에 실린 사진

총명했던 김마리아는 모교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1913년의 일이었죠. 이때부터 그는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1918년 도쿄유학생 독립단에 가세하고 이듬해에는 2·8독립운동에 참여합니다. 독립이 먼저라고 여긴 그는 코앞에 둔 졸업도 팽개칩니다. 2·8독립선언서 10여 장을 일본 옷 기모노의 허리띠(오비)에 숨겨 돌아옵니다. 3·1운동을 전후해 곳곳을 다니며 독립운동을 촉구했죠. 27세 때였습니다.

일제는 이런 김마리아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큰 언니는 “어떻게 몹시 맞았던지 가뜩이나 쇠약한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할 뿐 아니라 귀와 코에 고름이 들었다”고 눈물짓습니다. 작은 언니도 “거꾸로 매달아 죽든지 살든지 함부로 때렸다”라고 한숨을 내쉽니다. 그는 고문 탓에 오른쪽 가슴을 잃었고 코뼈 속에 고름이 차는 병과 신경쇠약을 얻어 평생 고통을 받았습니다.

5개월 뒤 풀려난 김마리아는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해 회장으로 독립운동에 나섭니다. 전국 15개 지방에 지부를 세우고 회원 2000여 명을 확보하죠. 군자금 6000원을 모아 상하이임시정부에 보냅니다. 현재 3억 원에 이르는 돈입니다. 출옥한 지 석 달여 만에 다시 붙잡혀 말하기 힘든 고문을 받았지만 그는 기죽지 않았습니다. 검사 앞에서 “나는 일본 연호는 모른다”라고 대꾸한 것이죠. 다이쇼 8년이라고 하면 넘어갈 일을 1919년이라고 말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체포와 고문, 옥살이로 신경쇠약이 너무 심해져 뼈만 남은 상태가 됐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음식을 못 넘겨 미음만 먹어도 모두 게워낼 지경이었죠. 검사도 보다 못했는지 보석을 허가했습니다. 하지만 친인척과 의료진만 만나도록 제한했습니다. 기자가 그를 직접 만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5회 연재 제목은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였고요.

마리아의 청춘은 아리고 쓰린 싸움의 나날이었다는 큰 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읜 뒤 남북으로 동서로 떠돌다 지옥 같은 감옥생활 끝에 병까지 들었으니 가슴이 으스러진다’며 눈물을 훔칩니다. 작은 언니는 ‘보석으로 내보내놓고 감옥보다 더 심하게 자유를 빼앗으니 치료도 효과가 없고 정신적 고통이 더욱더 심하다’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김마리아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죠. 징역 3년 형을 받은 뒤 일제의 감시가 느슨해진 집행정지 기간에 상하이로 탈출하죠. 현재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 의정원 제10회 회의에서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김마리아는 병마와 고독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독립을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病床(병상)에 누은

김마리아

(五(오))

一(일) 記(기) 者(자)


그리하다가 마리아의 큰형님 되는 김합라 씨는 다시 눈물을 씨스며 참으로 마리아는 불상하야요. 세 살에 아바님께서 돌아가시고 외로운 어머님 슬하에서 자라다가 열네 살 되든 해에 사랑하던 어머님까지 세상을 떠나시매 친척도 별노업는 우리 집안이오.

작은아바지(남북 만주로 망명하야 단이다가 작년에 호렬자로 인하야 『제제함니』에서 작고한 김필순(金弼順)씨께서도 중국으로 가시고 사나히 형제라고는 하나도 업슴으로 의지가지 업는 종적이 두 형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학생으로 혹 교사로 교회에도 의지하야 오날날까지 열네해 동안을 눈물과 쓰린 생활만 하여 왓슴니다. 어머니께서 운명하실 때에 우리에게 유언하시기를 『삼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래도 끗호로 마리아는 기어코 외국까지 류학을 식히라』고 곡진하신 말슴이 잇섯슴으로 우리들도 어머님의 유언을

뻬에 삭이어 어대까지던지 마리아는 공부를 식히랴고 하얏슴니다. 그리하야 오 년젼에 뎡신녀학교를 맛치고 제가 지금 잇는 광주(先州)에 와서 얼마동안을 잇다가 일본 동경으로 가서 여자학원대학부(女子學院大學部)에 입학하야 공부를 하다가 작년에 그 학교를 맛치고 도라오자 삼월 일일에 독립선언과 소요가 일어나매 마리아는 잡히어서 다섯달 동안을 총감부와 서대문감옥에 가서 잇다가 칠월에 보석을 하고 나왓는대 총감부에 잇슬 때에 엇더케 몹시 마잣던시  갓득이나 쇠약한 신경이 아조 말할 수 업시 쇠약할 뿐 아니라 귀와 코에

고름이 들엇슴으로 그것을 치로하든 중에 채 치료도 다하지 못하고 작년 구월에 대구로 잡히어 오앗스니가 마리아의 병으로 말하면 여간한 두 달 치료로는 낫을 수가 업슴니다. 일젼에 서울 박○○ 의사가 와서 약간 고름을 뽑아주기는 하얏스나 아즉도 완젼히 치료하랴면 만흔 시일이 걸닐 듯함니다. 과연 마리아의 쳥춘은 알이고 쓰린 싸홈의 살님이엇슴니다. 어리어서 일즉이 따듯한 사랑을 주시든 부모를 여이고 십사년 동안은 남북으로 동서로 표류하든 끗헤 심지어 남의 고향에 외로운 꿈도 뀌고 강호천(江戶川) 물결 소래에 선잠도 깨이다가 맛츰내  디옥까지 쓸쓸하고

죽엄갓치 어둡은 감방생활을 한 지가 벌서 일 년이 넘엇스며 몸에는 곳치기 어려운 몹쓸 병마의 유린(蹂躪)을 당하고 잇스니 참으로 그 불상한 것은 이로 말슴할 수도 업고 한뻬 한피를 난운 우리들로 말하면 때때로 가슴이 으서지는 듯함니다···하며 또다시 수건으로 눈을 싯는다. 『그런데요』 하고 이때까지 아모 말도 업시 안젓든 둘재 형님 되는 김미렴 씨는 말을 끄내인다.···마리아는 어리어서부터 참 건강하얏슴니다. 감긔 한 번 걸닌 일도 업섯고 밥 한 번 체한 일도 업섯슴니다. 그리고

재조도 비상하다고 선생들이 칭찬까지 하얏슴니다. 그럿튼 사람이 작년에 춍감부에서 몹시 고문을 당한 후에 이럿케 페인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분하고 원통함니다. 우리는 이즈랴 하야도 도모지 이즐 수 업는 것은 일본사람의 목석갓흔 고문(拷問)이올시다. 그때의 말을 들으면 걱구로 매이고 죽던지 살던지 함부로 첫다나요. 아! 모든 것이 업기만한 우리닛가 두말할 수는 업스나 이러한 일이 인도(人道)를 말하는 이들에게도 잇슬 줄은 참으로 생각지 못한 일이올시다. 마리아는 지금에 좀 자유롭게 내어바리어 두엇스면 병이 쉬웁게 회복될는지도 모름니다. 갓득이나 자유(自由)에 주린 사람을 보석하야 나온 후에도

감옥보다 더 심하게 구속을 하닛가 여간 치료도 별로 효험이 업고 정신상 고통은 더욱더욱 심한 모양이올시다···하며 남이 듯지 못하게 한숨을 내어 쉬인다.

◇◇

긔자는 이와갓치 오래동안 세 부인의 이야기를 듯고 나서 오후 다섯시쯤 하야 그 자리를 떠나 그들에게 작별을 하얏다. 다시 더 긔록하자면 의사의 말도 잇겟고 뎐옥(典獄)의 말도 잇스나 대개 내용은 임의 긔록한 바와 대동소이하기로 이제 그만 붓을 노코자 한다.(끗)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

5회

한 기 자


그렇게 하다가 마리아의 큰형님 되는 김함라 씨는 다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참으로 마리아는 불쌍해요. 세 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외로운 어머님 슬하에서 자라다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사랑하던 어머님까지 세상을 떠나시니 우리 집안은 친척도 별로 없어요. 남북 만주로 망명해 다니시다가 작년에 콜레라로 인해 ‘치치하얼’에서 작고하신 작은아버지 김필순 씨가 중국으로 가신 뒤 사내 형제라고는 한 명도 없어요. 의지할 곳 없는 발길을 두 언니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또는 학생으로 또는 교사로 교회에도 의지해 오늘날까지 14년간을 눈물과 쓰린 생활만 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운명하실 때에 우리에게 유언하시기를 “삼 형제 중에 위로 둘은 못하더라도 끝으로 마리아는 기어이 외국까지 유학을 시키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들도 어머님의 유언을 뼈에 새겨 어디까지든지 마리아는 공부를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5년 전에 정신여학교를 마치고 제가 지금 있는 광주에 와서 얼마 동안 있었지요. 그러다 일본 도쿄로 가서 여자학원 대학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작년에 그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고요.

3월 1일에 독립선언과 시위가 일어나자 마리아는 붙잡혀서 5개월 동안 총감부와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다가 7월에 보석으로 나왔어요. 총감부에 있을 때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지 가뜩이나 쇠약한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귀와 코에 고름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치료하던 중 채 치료도 다하지 못한 채 작년 9월에 대구로 잡혀왔으니까 마리아의 병으로 말하면 두 달 치료로는 여간해서 나을 수가 없습니다. 일전에 서울 박○○ 의사가 와서 고름을 약간 뽑아주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완전히 치료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정말 마리아의 청춘은 아리고 쓰린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려서 일찍이 따뜻한 사랑을 주시던 부모를 여의고 14년 동안은 남북으로 동서로 표류하던 끝에 심지어 남의 고향에서 외로운 꿈도 꾸고 에도강 물결 소리에 선잠도 깼지요. 마침내 지옥같이 쓸쓸하고 죽음같이 어두운 감방생활을 한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습니다. 몸에는 고치기 어려운 몹쓸 병마의 유린을 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그 불쌍한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어요. 한 뼈 한 피를 나눈 우리들로 말하면 때때로 가슴이 으스러지는 듯합니다···라며 또다시 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런데요” 하고 이때까지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던 둘째 형님 되는 김미렴 씨가 말을 꺼낸다.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참 건강했습니다. 감기 한 번 걸린 일도 없었고 밥 한 번 체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재주도 비상하다고 선생들이 칭찬까지 하였지요.

그랬던 사람이 작년에 총감부에서 몹시 고문을 당한 후에 이렇게 폐인 지경에 이른 것은 참으로 분하고 원통합니다. 우리는 잊으려 해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일본사람의 목석같은 고문이올시다. 그때의 말을 들으면 거꾸로 매달아 죽든지 살든지 함부로 때렸다나요. 아! 모든 것이 없기만한 우리니까 두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이 인도를 말하는 이들에게도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생각지 못할 일이었어요.

지금 마리아는 좀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 병이 쉽게 회복될는지도 모릅니다. 가뜩이나 자유에 주린 사람을 보석으로 나온 뒤에도 감옥보다 더 심하게 구속을 하니까 여간한 치료도 별 효험이 없고 정신적 고통은 더더욱 심한 모양이에요···하며 남이 듣지 못하게 한숨을 내쉰다.

◇ ◇

기자는 이렇게 오랫동안 세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오후 5시쯤 그 자리를 떠나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더 기록하려 하면 의사의 말도 있겠고 간수장의 말도 있지만 대개 내용은 이미 기록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제 그만 붓을 놓으려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