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4월 15일

블랙리스트 필자 글 삭제? 그럼 우린 다른 글 또 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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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종열(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 힘듭니다. 흔히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라 하지만 철학, 과학, 종교, 역사, 사회심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습니다. ‘동아플래시100’ 코너에서 소개했던 국내 첫 서양음악회의 주인공 류겸자(야나기 가네코)의 남편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조선을 사랑한, 조선인의 벗’이라는 말에 가장 애착을 가졌을 것 같네요.

23세 때인 1912년 도쿄의 한 박람회에서 조선 도자기를 처음 접한 류종열은 2년 뒤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文角壺·풀 문양을 새긴 각진 청화백자)를 본 뒤 조선예술에 빠져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합니다. 1916년 첫 조선 방문 때 석굴암을 답사하고는 “불멸의 힘, 불후(不朽)의 미(美)가 있다”고 극찬했습니다.

조선의 예술과 조선인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던 류종열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고 있다는 비극을 듣고 그 해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함’이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동아일보 창간기자인 염상섭은 이 글을 보고 우리말로 옮겨 1920년 4월 12일자부터 2면에 6회 연재합니다. 학계 일각에서는 류종열이 조선예술을 ‘비애(悲哀)의 미(美)’로 규정해 패배주의를 조장했고, 폭력이 아닌 ‘정애(情愛)’를 호소해 그가 일제 문화정치를 도왔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선인을 생각함’을 뜯어보면 그의 참뜻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제의 교육정책을 비판한 부분이 삭제된 류종열의 기고 ‘조선인을 생각함’ 4회.

4월 13일자 2회에는 ‘조선인을 괴롭힌 것은 우리의 선조였다. 조선정벌은 고대의 무사가 그들의 정복욕을 위해 기획한 죄행이었다. ··· 오늘날 조선의 고 예술이 폐퇴하고 파괴된 것은 왜구의 죄행’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신의 선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리를 ‘왜구’, 그들의 침략을 ‘정복욕에 눈먼 죄행’이라고 맹비난한 겁니다. 15일자 4회에서도 류종열은 “일본은 물질적, 정신적으로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을 박탈했다”고 단언한 뒤 교육문제를 언급하며 “일본의 도덕과 일본 황실의 은혜를 교육하며 조선인에게 약탈자를 존경하라는 것은 기이하고도 모순에 찬 소리”라고 일갈합니다.

이런 글을 쓴 필자도 대단하지만, 창간한지 보름도 안 된 신생 신문이 이를 발굴해 게재한 것은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결국 총독부는 교육문제를 다룬 4회의 일부를 삭제하도록 했습니다. 같은 날 발매금지된 3면 기사 ‘평양에서 만세 소요’까지 한꺼번에 두 건이나 제재를 가한 겁니다.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1920년 창간한 3개 민간신문으로도 첫 제재였습니다.
이전공사를 하기 직전인 1926년의 광화문. 총독부는 당초 신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헐 계획이었으나 동아일보가 류종열의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연재한 것을 계기로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이전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을 생각함’의 연재가 4월 18일 끝나자마자 다음날부터 류종열의 두 번째 기고 ‘조선 벗에게 드리는 글’을 실었습니다. 총독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린 필자의 또 다른 글을 보란 듯 게재한 것이죠. 4월 20일자 2회에는 ‘노상을 지나는 사람의 머리는 앞으로 떨어지고, 고통과 원한이 미간에 나타난다. 백성은 햇빛을 피해 검은 그늘에 모여드는 것 같다’는 음울한 표현이 나오는데 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더 이상의 게재를 금지합니다.

동아일보는 다시 1922년 8월 24일자부터 류종열의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를 5회 연재했습니다. 일제가 경복궁 안에 총독부 신청사를 지으면서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버린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을 의인화해 비통해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계기로 광화문 철거 반대여론이 국내외에 들끓었고, 결국 총독부는 광화문을 이전하는 것으로 대신해 최악만은 피하게 됩니다.
세상을 떠난 류종열 씨 대신 문화훈장을 받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아들 류종리(오른쪽) 씨가 1984년 9월 김상만 동아일보 명예회장을 예방해 환담하고 있다.

류종열은 1961년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의 문화예술을 보존하고 널리 소개한 공로가 인정돼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1984년 한국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습니다. 그때 부친을 대신해 훈장을 받은 그의 아들 류종리(야나기 무네미치)는 동아일보를 방문해 “동아일보가 선친에게 베풀어준 호의와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朝鮮人(조선인)을 想(상)함(四·사)

東洋大學(동양대학) 哲學科 敎授(철학과 교수) 柳宗悅(류종열)


逼迫(핍박)과 抑壓(억압)을 밧는 彼等(피등)의 運命(운명)은, 間斷(간단) 업시 孤寂(고적)과 憧憬(동경)에서, 慰安(위안)의 世界(세계)를 求(구)하얏다. 悲母(비모)의 觀音(관음)은 彼等(피등)의 靈(영)의 慰安(위안)이엿다. 優雅(우아)하고 溫柔(온유)한 高麗(고려)의 磁器(자기)는 每日(매일)의 질거운 親故(친고)이얏다. 余(여)는 그 藝術(예술)을 생각할 때마다 솟아나오는 을 생각지 안을 때가 업다. 그 藝術品(예술품)을 製作(제작)한 者(자)가 무엇을 求(구)하며 무엿을 表現(표현)코자 하얏는가를 아는 者(자)는 愛情(애정)을 彼等(피등)의게 보내지 안을 수 업슬 것이다. □함을 嘲弄(조롱)하는 것이 무슨 자랑이 되리요 彼等(피등)의 孤寂(고적)함은 心底(심저)로부터 滲出(삼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懇切(간절)한 生命(생명)의 소래다. 이러한 經驗(경험)이 그 藝術(예술)로 하야금 永遠(영원)케 하고 그 作品(작품)을 永劫(영겁)의 美(미)에 引導(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如何(여하)한 國家(국가)도, 彼等(피등)의게 情愛(정애)를 준 者(자)는 업섯다. 支那(지나)는 拒抗(거항)할 수 업는 暴君(폭군)이엿다. 그 勢力(세력)이 衰(쇠)하엿슬 때에, 代立(대립)한 것은 朝鮮(조선) 自身(자신)이 안이뇨, 滿洲(만주)로부터 脅迫(협박)하야온 露國(로국)의 勢力(세력)이엿다. 그러고 最近(최근)에 그 地位(지위)를 빼앗은 者(자)도 亦是(역시) 朝鮮(조선) 自身(자신) 안이요, 玄海(현해)를 隔(격)한 日本(일본)이엿다. 朝鮮(조선)은 다만 『때』의 흐름과 갓치 變(변)하는 暴君(폭군)을 마즐 뿐이엿다. 彼等(피등)은 漸次(점차)로 疲勞(피로)하고 衰頹(쇠퇴)한 悲境(비경)에 하는 수 업시 빠젓다, 勿論(물론) 새로운 支配者(지배자)는, 녯적과 갓치 掠奪(약탈)과 收斂(수렴)으로 彼等(피등)을 괴롭게 하지는 안는다. 오히려 此(차)에 反(반)하야, 多額(다액)의 金錢(금전)과 諸般(제반) 政治組織(정치조직)과, 所謂(소위) 敎育(교육)이란 것을 彼等(피등)에게 보내랴고 努力(노력)하엿다.

그러나 吾人(오인)은 爲先(위선) 彼等(피등)에게서 軍隊(군대)를 빼아슨 後(후)에 彼等(피등)의 겟이 안인 吾人(오인)의 軍隊(군대)를 보냇다, 吾人(오인)은 彼等(피등)에게 對(대)하야 永遠(영원)히 獨立(독립)이 不可能(불가능)할 固定的(고정적) 方法(방법)을 取(취)하엿다. 그뿐만 아니라 自立(자립)할 彼等(피등)의 精神(정신)을 無視(무시)함으로써 다만 日本(일본)에 適當(적당)한 道德(도덕)과 敎育(교육)을 주엇다. 一言(일언)으로 察(찰)하면 物質(물질)으로나 靈(영)으로나 彼等(피등)의 自由(자유)와 獨立(독립)을 迫奪(박탈)하엿다.

이갓치 하야 日本(일본)의 思想(사상)을 扶植(부식)코자는 하나 彼等(피등)의 心靈(심령)을 살니랴고는 아니한다. 彼等(피등)에게 對(대)할 때에 주는 것은, 칼날이요 愛(애)는 안이엿다. 吾人(오인)은 費用(비용)과 主權者(주권자)를 주고, 彼等(피등)의 自由(자유)와 交換(교환)하얏다. 彼等(피등)은 生命(생명)과 財産(재산)의 保證(보증)을 엇기 爲(위)하야 愛(애)를 永遠(영원)히 斷念(단념)할 수밧게 업는 悲哀(비애)를 맛보앗다. 그러나 사람은 地位(지위)를 빼앗을 수는 잇스되, 그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하는 것이다. 彼等(피등)은 前如(전여)히 愛(애)에 주린 不安(불안)한 날을 續(속)하고 잇다.


四(사)

『日本(일본)은 吾人(오인)을 爲(위)하야 敎育(교육)하느냐, 日本(일본)을 爲(위)하야 敎育(교육)하느냐』라고, 엇더한 朝鮮人(조선인)이 余(여)의게 質問(질문)한 일이 잇섯다, 如何(여하)한 日本人(일본인)이던지 前者(전자)라고 能(능)히 對答(대답)할 者(자)가 잇슬가. 實(실)로 그 敎育(교육)은 彼等(피등)의 衷心(충심)의 要求(요구)와 歷史的(역사적) 思想(사상)을 重視(중시)하는 敎育(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如此(여차)한 者(자)를 否定(부정)하고, 歷史(역사)를 敎授(교수)치 안코, 外國語(외국어)를 避(피)하고, 日本語(일본어)로만 日本(일본)의 道德(도덕)과, 彼等(피등)과 只今(지금)까지 無關係(무관계)이얏든 皇室(황실)의 恩惠(은혜)를 中樞(중추)로 삼아, 彼等(피등)의 思想(사상) 方面(방면)까지를 變更(변경)하랴는 敎育(교육)이다.

全然(전연)히 更新(경신)한 敎育方針(교육방침)에 對(대)하야, 彼等(피등)이 生疎(생소)한 情(정)을 가짐도 自然(자연)한 事實(사실)일 것이다. 彼等(피등)의게는 掠奪者(약탈자)로 보이든 者(자)를 가장 尊敬(존경)하라는 것은 彼等(피등)의게 理解(이해)할 수 업는 奇異(기이)하고 矛盾(모순)에 채운 소리로 들닐 것이다.

余(여)는 京城(경성)에 엇던 날 李朝(이조) 初期(초기)의 作(작)인 듯한 古代(고대)의 優秀(우수)한 刺繡(자수)를 求(구)하얏다. 的確(적확)히 明朝(명조)의 作(작)의 影響(영향)바든 것이나, 그 色彩(색채)로 보든지 線(선)으로 보든지 圖案(도안)으로 보든지, 古(고) 朝鮮(조선)의 美(미)를 表明(표명)함에 充分(충분)한 作品(작품)이엿다. 그 後(후) 몃칠이 안되야, 余(여)는 案內(안내)를 엇어서 朝鮮人(조선인)의 高等女學校(고등여학교)를 □親(□친)하야 生徒(생도)의 製作品(제작품)을 無數(무수)히 보앗스나, 마참 壁(벽)에 걸엿든 大作(대작)의 刺繡(자수)를 볼 때, 余(여)는 奇異(기이)한 感慨(감개)를 익이 못하얏다. 그것은 어대로 보든지 朝鮮(조선) 固有(고유)의 美(미)를 認識(인식)할 수 업는 現代(현대) 日本式(일본식)의 作品(작품)- 卽(즉) 半(반) 西洋化(서양화)하야 趣味(취미)도 업고 氣品(기품)도 업는, 愚劣(우열)한 圖案(도안)과 淺薄(천박)한 色彩(색채)의 作品(작품)이엿다. 그러나 敎師(교사)는 그것을 說明(설명)하되 最優(최우) 最良(최량)한 作品(작품)이라 하엿다.

余(여)는 余(여)의 所有(소유)한 古(고)刺繡(자수)를 回想(회상)하야 보고, 그릇된 敎育(교육)의 罪(죄)를 생각하엿스며, 이러한 敎育(교육)을 無理(무리)하게 밧음으로써, 그 固有(고유)의 美(미)를 일어가는 朝鮮(조선)의 損失(손실)을 야속히 생각하얏다.

日本(일본)의 古藝術(고예술)은 恩惠(은혜)를 밧은 것이다. 法隆寺(법륭사)나 奈良(내량)의 博物舘(박물관)을 訪問(방문)하는 者(자)는 그 事實(사실)을 熟知(숙지)할 것이다. 吾人(오인)이 今日(금일)에 國寶(국보)라 하야 海外(해외)에 자랑할 만한 것은, 거의 支那(지나)와 朝鮮(조선)의 恩寵(은총)을 밧지 안은 者(자)는 업슬 것이다. 그러하거늘 今日(금일)의 日本(일본)은 그 固有(고유)한 朝鮮藝術(조선예술)의 破壞(파괴)로써 이에 報答(보답)하얏다.

或(혹) 好事家(호사가)는 古作品(고작품)을 聚集(취집)할지는 모르나, 彼等(피등)에게 이갓흔 作品(작품)을 再造(재조)하랴는 熱心(열심)을 喚起(환기)케 하랴는 것은 안이다. 이것이 所謂(소위) 同化策(동화책)이라 할진대, 그것은 可恐(가공)한 同化(동화)다. 余(여)는 世界(세계)의 藝術(예술)에 重要(중요)한 位置(위치)를 占領(점령)한 朝鮮(조선)의 名譽(명예)를 保留(보류)하는 것이, 日本(일본)의 取(취)할 바 正當(정당)한 人道(인도)라고 思惟(사유)하는 바이다. 敎育(교육)은 彼等(피등)을 살이기 爲(위)한 敎育(교육)이요, (精神的·정신적으로) 쥭이기 爲(위)한 敎育(교육)은 안이다.

조선인을 생각함(4)



동양대학 철학과 교수 류종열


그들(조선 사람들)은 핍박과 억압받는 운명 때문에 끊임없이 쓸쓸함과 그리움에서 위안의 세계를 찾았다. 자비로운 어머니 같은 관음(觀音)은 그들의 영혼의 위안이었다. 우아하고 온화한 고려의 자기는 매일 대하는 즐거운 친구였다. 나는 그 예술을 생각할 때마다 솟아나는 눈물을 생각지 않을 때가 없다. 그 예술작품의 제작자가 무엇을 희구하며,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가 아는 사람은 그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약함을 조롱하는 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그들의 쓸쓸함은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생명의 소리다. 이런 경험이 그들의 예술을 영원하게 했고, 그들의 작품을 영겁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국가도 그들에게 정과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았다. 중국은 항거할 수 없는 폭군이었다. 중국의 힘이 약해졌을 때 대신 일어선 것은 조선이 아니라 만주에서부터 밀어닥친 러시아 세력이었다. 그리고 최근 그 지위를 빼앗은 자도 역시 조선 자신이 아니요,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이었다. 조선은 다만 시류와 함께 바뀌는 폭군을 맞을 뿐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하릴없이 피곤해지고 쇠퇴해지는 슬픈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새로운 지배자는 과거와 같은 악랄한 약탈과 강제징수로 그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많은 돈을 들여 제반 정치조직을 갖추고, 이른바 교육이란 것을 그들에게 베풀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 일본인은 가장 먼저 조선인에게서 군대를 빼앗은 뒤 그들의 것이 아닌, 일본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그들에 대해 영원히 독립이 불가능할 확고한 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조선인의 자립정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오직 일본에 적합한 도덕과 교육을 주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조선인의 자유와 독립을 박탈해버린 것이다.

이같이 해서 조선 땅에 일본의 사상을 심어 뿌리내리게 했을 뿐, 그들의 마음을 살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을 대할 때 주는 것은 칼날이요,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 우리 일본인은 조선에 비용과 통치자를 보내 그들의 자유와 맞바꿨다. 조선인은 생명과 재산을 보장받기 위해 영원히 사랑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비애를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남의 지위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그 마음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조선인들은 여전히 사랑이 굶주린 불안한 나날을 계속하고 있다.


4.

어떤 조선인이 나에게 “일본은 우리를 위해 교육하느냐, 일본을 위해 교육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어떤 일본인이 “조선인을 위해 교육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실로 그 교육은 조선인이 진심으로 요구하고, 그들의 역사적 사상을 중시하는 교육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부정하고, 진실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외국어를 피하고, 일본어로만 일본의 도덕,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던 일본 황실의 은혜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사상까지 바꿔 놓으려는 교육이다.

때문에 이같이 완전히 새로운 교육방침에 대해 조선인이 전혀 친근감을 갖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들에게 약탈자로 보이는 자를 가장 존경하라는 것은 조선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도 모순에 찬 소리로 들릴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경성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인 듯한 오래되고, 빼어난 자수를 구했다. 틀림없이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색채로 보나, 선으로 보나, 도안으로 보나 옛 조선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걸작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안내를 받아 조선인 고등여학교를 참관해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마침 벽에 걸린 커다란 자수를 보고 나는 기이한 느낌을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어디로 보든 조선 고유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없는 현대 일본풍의 작품, 즉 절반은 서양화돼 감흥을 느끼게 하는 멋도 없고, 기품도 없는 어리석고 열등한 도안에 천박한 색을 입힌 작품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것을 가장 우수하고,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내가 소유한 고 자수를 떠올려 보고는 잘못된 교육의 죄를 생각했다. 이런 교육을 강요받으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조선의 손실을 야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고 예술은 실상 이웃나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이다. 호류지(法隆寺)나 나라(奈良)의 박물관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그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국보라 해서 해외에 자랑할 만한 것은 거의 중국과 조선의 은총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일본은 그 고유한 조선예술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에 보답하는 것이다.

혹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은 옛 작품을 수집할지 모르지만, 조선인에게 이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려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른바 ‘동화정책’이라 한다면, 그것은 실로 가공할 동화다. 나는 세계 예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조선의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 일본이 취해야 할 정당한 인도(人道)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교육은 조선인을 살리기 위한 교육이지, 그들을 정신적으로 죽이기 위한 것이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