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06월 04일

살아도 차별 죽어도 차별, ‘조선인 차별’ 생생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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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4일자부터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시리즈를 실었습니다. 6월 4일자에 19회로 끝낸 장기 기획기사였습니다. 한 해 전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시정을 펼친다고 한 말을 검증한 기사였죠. 일시동인은 ‘모두를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외친 ‘평등의 정치’를 10개월 동안 얼마나 잘 했는지 따져보겠다는 의도였죠. 구체적인 항목을 하나하나 볼까요?

차별을 없앤다면서 총독부 고위관리인 고등관에는 조선인을 새로 뽑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있던 사무관 2명 말고는 조선인 고위관리는 없었던 것이죠. 조선 사람이 일본어를 잘 배운다고 입만 열면 떠들면서 총독부에 조선인 통역관은 전무했습니다. 조선말도, 조선예식도 모르는 일본인이 조선왕가 제사과장을 맡아 제사를 빼먹었는데도 태평일 뿐이었죠.

사이토는 하위관리인 판임관 봉급령을 고쳐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최대 4배 많던 월급을 조정했습니다. 그런데 봉급을 조금 올린 대신 등급을 깎아버렸습니다. 5급이던 조선인을 8급으로 낮췄으니 전에 부하였던 일본인이 졸지에 상사가 돼버렸죠. 기자는 “한 손에 떡을 주며 아이를 달래면서 다른 손으로는 뺨을 때린 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더구나 본봉 차이는 줄었다고 해도 체재료인 가봉이나 사택료, 관사 등은 일본인만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해 모두 합하면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평균 2배 더 받은 셈이었죠. 일본인은 지식과 하는 일이 많다, 생활수준이 높아 생활비가 많이 든다, 고향에 돈을 보내야 하고 외지에 나와 일하지 않느냐, 라고 변명했습니다. 사이토는 임시수당지급규칙을 새로 만들었지만 판임관 최고등급 수당은 일본인이 49원 올랐을 때 조선인은 8원 인상에 그쳤고 최하등급 수당은 일본인이 19원 올랐으나 조선인은 4원 늘었을 뿐입니다.

총독부 관리만 차등이 있었을까요? 청원순사 월급은 일본인이 56원 선, 조선인은 31원 선이었습니다. 요즘 시세로 일본인은 월 280만 원, 조선인은 155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아래로 내려가 일용직을 보면 가장 낮은 급여가 조선인은 50전인 반면에 일본인은 1원 이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총독부의 차별 정치는 사회 곳곳에 차별 정서를 퍼뜨렸습니다. 경성부에서는 연고가 없는 사망자가 생기면 일본인은 관을 짜서 매장을 해줬지만 조선인은 거적으로 싸서 묻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생전에 차별을 받는 것도 철천의 한이 되는 판에 죽은 뒤에까지 차별을 당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라고 울분을 토합니다.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회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차에 치여 숨진 일본인에게는 조위금 200원을 지급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절반인 100원만 주고 말았습니다. 기자는 “조선사람 장례비는 일본사람의 절반밖에 들지 않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럼 사회적 발언권이 있는 변호사들은 달랐을까요? 합병 뒤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제1변호사회와 조선인만 참여한 제2변호사회가 있었습니다. 법원 요구로 두 변호사회를 하나로 합친 뒤 임원 선거를 치렀습니다. 조선인 변호사 수가 많아 박승빈 변호사가 회장으로 선출됐죠. 일본인 변호사들은 덮어놓고 ‘조선인 회장은 안 된다’고 거부해 다시 선거를 해야 했고 그 결과 일본인이 선출됐습니다. 임기가 끝나 다시 선거를 하자 이번엔 조선인 장도 변호사가 회장이 됐습니다. 그러자 일본인 변호사들이 또 들고 일어나 결국 변호사회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학식이 떨어지는 조선인 변호사 밑에서 일하는 것은 일본인 변호사의 치욕이다, 조선인 회장은 관청이나 일본인을 상대하기 힘들다며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학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0여 곳을 제외한 모든 학교의 교장 자리를 일본인이 독차지했습니다. 교내의 중요한 결정은 일본인이 다 하고 조선인 교사는 들러리만 설 뿐이었죠. 같은 교사이지만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2배 많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일본인 교사가 ‘일시동인’이니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차별이 없다’느니 입이 닳도록 떠든들 어린 학생들이 곧이듣겠느냐”고 기자는 따져 물었습니다.

학생들로 시선을 돌리면 일본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고등학교 7년), 대학교 3, 4년 교육을 받지만 조선인은 보통학교 4년, 고등학교 4년, 전문학교 3년이 고작이었습니다. 일본인은 17년까지 받는 교육을 조선인은 11년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인 학생은 고등학교에까지 수공과를 두어 수업시간에 바구니를 짜고 짚신을 삼게 했습니다. 영어는 필수과목도 아니었죠. 총독부는 조선인도 학력이 일본인과 같으면 관리로 채용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문을 닫아걸고 너도 들어오면 문안에 있는 사람과 같이 대접을 한다”고 하는 말고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주거환경에도 차등이 있었습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청계천 남쪽 남촌에는 공원도 많고 가로등도 넉넉해 골목길이 환했지만 조선인들이 주로 사는 북촌은 탑골공원 하나 뿐에 길은 좁고 어두웠습니다. 게다가 남의 집 앞에 수십, 수백 개씩 똥통을 늘어놓는 것도 북촌에만 있는 행태라고 비판했습니다. 임야는 일본인에게만 빌려주고 논밭도 일본인에게만 25년 분할상환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차별 대우는 줄을 이었습니다.

기자는 최종회에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실력양성이 해결책이었습니다. ‘눈앞의 차별을 한탄하기보다 돌아앉아 나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하대를 당하지 않는 제일 가까운 길이고 제일 튼튼한 방법이며 제일 이익이 되는 계획’이라는 것이었죠. 그래야 어느 분야에서든지 일본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가 나가는 동안 ‘억울한 차별대우의 경험담’ 투고를 받아 ‘독자의 소리’로 게재했습니다. 독자와 쌍방향 소통을 한 것이었죠. 독자들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면서 실력양성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1월 22일
弱者(약자)의 哀聲(애성)일뿐


학대를 밧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학대를 부르지짐보다 수양하고 노력하라

일본사람과 가치만 되야도 학대는 안나다

잘 배호고 잘 버러라 우리 동포여


無差別(무차별)인가? 大差別(대차별)인가? 十九(십구)


작일까지 『차별문뎨』를 의론한 것이 전후 십팔회이라. 그동안 의주하야 재등 씨가 새로히 촉독이 되야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벌을 아니한다는 성명을 하고 조선에 건너온 뒤에 금일까지에 얼마나

그 성명을 실행하얏는지 주요한 각 방면으로 ㅤ삺혀보고 또 관쳥뿐 아니라 유식계급 되는 민간에서는 얼마나 일본사람과 조선사람 사이에 차별을 하는가 이것을 약간 소개하얏다. 본래 차별대우를 밧는 불평을 차별대우 밧는 편에서 『나를 엇지하야 하느냐고 부르지짐은 약한 자의 소래이과. 실로 우리의 본의가 아니로다. 무엇으로던지 실력이 남과 갓하얏스면 남이 업수히 녁이랴면 업수히 녁일 수가 잇스며 학대를 한들 차이를 밧을 리가 잇스랴. 목젼의 차별을 한탄함보다 도라 안저서

나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하대를 밧지 안는 데까지 이르기에 뎨일 갓가온 길이오 뎨일 튼튼한 방법이오 뎨일 리익되는 계획이라. 이것에만 힘을 쓰지 아니하고 덥허놋코 『나를 하대하지 말라』함은 공연한 부르지짐에 지나지 못하는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엿마는 이 차별대우를 밧는데 대하야 원한이 너무 기프매 참아 입을 다물 수가 업고 불평이 너무 크매 참아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업슬 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조선사람에게 대한 일본사람의 차별이 조선사람이 향상하고저 수양하며 행복 엇고저 노력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 잇는 것을 보고 도뎌히

아모 말도 업슬 수 업는 것은 조선사람 누구이든지 디가치 가진 마음이라. 우리가 차별문뎨를 드러서 우의 불평을 부르지짐도 그 본의가 실로 이에 지나지 못하는도다. 이 문뎨를 의론하는 동안에는 총독부 당국자의 귀에 매우 듯기시른 소리도 만앗슴 것이오. 하대밧는 편의 말인고로 하대하는 편의 감정과는 다른 일도 만잇지마는 이로써 조선사람을 하대하는데 대하야 조선사람의 불평이 얼마나 기푸며 자긔들의 하는 일이 얼마나 정의(正義)에 뎍합하고 인도(人道)에 틀님어 업는지 고요히 도라디 보지 아니치 못할 것이오. 또 한편으로 우리

조선사람들은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을 하대한다고 이 일에만 대하야 볼평을 부르지지고 경의를 같일 것의 아니라 이쳔만 동포가 마음 한뜻으로 쳔 가지 만 가지의 장해를 물리치면서 잘 버러서 학식으로던지 돈으로던지 적어도 일본사람과 가치되기를 힘써서 일로밧비 일본사람과 무엇으로던자 열개를 견줄 만하게 될지어다. 그때에 이르러야 차별인들 누가 하며 무엇인을 뉘가 하리오. 이 분을 장차 던지랴 하매 감개가 자못 깁흔 동시에 동포의 로력을 희망함이 한창 간절하며 이 긔사에 동정하야 열성의 찬동을 앗기지 아니하고 차별의 실례를 투고한 독자제군의게 눈물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노라.(끗)
약자의 슬픈 소리일뿐


학대는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학대 받는다고 외치기보다 수양하고 노력하라

일본인과 같이만 되어도 학대는 안 당한다

잘 배우고 잘 벌어라 우리 동포여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19



어제까지 『차별문제』를 의논한 것이 모두 18회이다. 그동안 토의하여 사이토 씨가 새로 총독이 되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고 조선에 건너온 뒤에 오늘까지 얼마나 그 성명을 실행하였는지 주요한 각 분야로 살펴보았다. 또 관청뿐만 아니라 지식계급인 민간에서는 얼마나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을 하는지 이것을 약간 소개하였다.

본래 차별대우를 받는 불평을 차별대우 받는 쪽에서 『어째서 나를 차별하느냐』고 외치는 것은 약한 자의 소리이다. 사실은 우리의 본뜻은 아니다. 무엇이든지 실력이 남과 같다면 남이 업신여기려 해도 업신 여길 수가 있으며 하대를 한들 하대를 받을 리가 있겠는가. 눈앞의 차별을 한탄하기보다 돌아앉아서 나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하대를 받지 않는 위치까지 이르기에 제일 가까운 길이고 제일 튼튼한 방법이며 제일 이익이 되는 계획이다. 이것에만 힘을 기울이지 않고서 덮어놓고 『나를 하대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공연한 외침에 지나지 않는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차별대우를 받는데 대하여 원한이 너무 깊어서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고 불평이 너무 커서 차마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이 조선인이 향상하려고 수양하며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조선인 누구든지 다 같이 가진 마음이다.

우리가 차별문제를 들어서 이상의 불평을 부르짖는 것도 그 본뜻은 참으로 여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의논하는 동안에는 총독부 당국자의 귀에 매우 듣기 싫은 소리도 많았을 것이다. 하대받는 쪽의 말이므로 하대하는 쪽의 감정과는 다른 일도 많이 있지만 이로써 조선인을 하대하는데 대하여 조선인의 불평이 얼마나 깊으며 자기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정의에 적합하고 인도에 틀림이 없는지 차분히 돌아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우리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하대한다고 이 일만을 놓고 불평을 외치고 놀라며 의심하는 것 같이 하지 않아야 한다. 2000만 동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천 가지 만 가지의 장애를 헤쳐 나가면서 잘 벌어 학식으로든지 돈으로든지 적어도 일본인과 같이 되기를 힘써서 하루바삐 일본인과 무엇으로든지 어깨를 견줄 만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차별인들 누가 하며 무엇인들 누가 하겠는가. 이 붓을 이제 놓으려니까 감회가 자못 깊은 동시에 동포들이 노력해 줄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 이 기사에 공감하여 뜨거운 찬동을 아끼지 않고 차별의 사례를 기고한 독자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감사의 뜻을 표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