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여왕님은 민주적인데…대통령들은 왜 제왕적일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9일 16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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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獻身·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 8일 서거한 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헌신이란 이렇게 하는 것임을 보여줬다. 96세에도,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도, 여왕은 우아하고도 기품 있게 지팡이를 짚고는, 한때 군주제 폐지를 외쳤던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와 새 내각 구성에 관한 회동을 가졌다고 했다.

그렇게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다 바치고는, 앓을 새도 없이 여왕은 우리 곁을 떠났다. 21살 때인1947년 남아공연방 케이프타운에서 맞은 생일 자리에서 “제 삶이 길든 짧든 모두 국민 여러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고 선언했던 그 다짐 그대로였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 이틀 전인 9월6일(현지 시간)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를 접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애버딘셔=AP 뉴시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 이틀 전인 9월6일(현지 시간)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를 접견하며 악수를 하고 있다. 애버딘셔=AP 뉴시스


●나라 위해 아들까지 희생시켰던 여왕
내 나라, 남의 나라 할 것 없이 정치적 양극화가 판치는 세상이다. 어떤 정파나 이데올로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만 위한다는 게 쉬울 리 없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엘리자베스 공주는 군 수송부대 여자국방군에 입대해 대형 트럭운전을 했다.

남편 필립 공은 해군 장교였고 아들 찰스 왕세자도 해군으로 근무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고위층은 물론 고위층 자제들 병역기피가 수두룩한 우리 현실이 많이 부끄럽다). 내 한 몸 나라와 국민에 바치는 게 보통 일인가. 더구나 자식까지 희생시켜가며 오로지 공공, 의무, 통합, 관용, 화해, 애국, 봉사를 실천하는 건 쉬운 일이던가.

이젠 왕이 된 찰스3세는 젊은 날 ‘온전한 왕세자빈’을 구하기 위해 불행한 결혼을 해야만 했던 아픔이 있다. 이혼녀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왕관을 버렸던, 그래서 군주제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큰아버지 에드워드8세 같은 일을 또 벌여선 안 됐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어떤 이념의 대통령이었나
재임 시절 무슨 이유에선지 딸과 손자를 태국으로 내보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쓰도록 법제화한 북한에 대해 하필 (발음도 해괴한) 18일 “정부가 바뀌었어도 ‘9·19 군사합의’는 마땅히 존중하고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고 발언했다. 북한 김정은은 개성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그놈의 합의를 무수히 파기했는데 말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0년 6월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현장을 공개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20년 6월 17일 2면에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현장을 공개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에게 핵포기 의사가 있다고 국민 앞에 거짓을 말했던 문 전 대통령이었다. 정권이 교체된 데는 북한에 굴종적이어서, 안보가 불안해서라는 이유도 적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가 위협받는 판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거짓약속을 존중해야 한다니, 문재인은 대체 어떤 이념을 지닌 대통령이었단 말인가.

정파와 이념에서 자유롭지 않은 대통령제는 미국만 빼곤 한 세기도 안 돼 죄다 실패했다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지적한다. 심지어 요즘엔 미국서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1월 6일 극렬 지지자들을 선동해 미국 의사당 난립 사건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조사까지 진행되는 판국이다. 대통령제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이다.

●민주국가 톱10 중 5개국이 군주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정파와 이념을 초월해 국민을 하나로 통합해주면서, 모든 국민에게 위안을 주고 화합의 상징이 돼주는 (입헌)군주제가 민주주의에 잘 맞는다는 패러독스가 영국에서 나오는 모양이다(^^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돌아가신 영국이니까요).

이코노미스트 부설 조사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167개국을 조사한 2021년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실제로 글로벌 톱10국가 중 절반인 5개국이 군주국이었다(1위 노르웨이, 2위 뉴질랜드, 4위 스웨덴, 6위 덴마크, 9위 호주).

좀 신기하지 않은가. 입헌군주국이긴 하지만 왕을 모신다는 건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글로벌 톱20개국으로 넓히면 딱 절반인 10개국에서 왕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11위 네덜란드, 12위 캐나다, 14위 룩셈부르크 그리고 17위인 일본과 18위인 영국. 궁금하신 분을 위하여 알려드리면 한국은 16위였다).

2013년에 즉위한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가족. 신화통신
2013년에 즉위한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가족. 신화통신
●그런데 왜 대통령들은 제왕적이 되는가

민주주의 지수에선 20위까지가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된다. 당연히 입헌군주제이고 모두 의원내각제다. 눈치들 채셨겠지만 일본을 제외하곤 북유럽과 서유럽, 그리고 영연방과 영국(성공회) 개신교 국가들이다. 15~17세기 계몽군주가 자신의 이익보다 국민을 앞세우는 ‘책임정부’와 법치주의를 확립해선 지금까지 군주제의 역사와 전통을 지켜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구상의 80%를 지배했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들이 독립하면서 대거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로 성공한 나라는 우리나라와 우루과이, 코스타리카 등 달랑 3곳이다(미국도 ‘결함 있는 민주주의’란다). 선진 군주들은 민주적이지만 후진 대통령이 제왕적인 법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2차 대전 패배로 사라졌지만 국민을 내 편 아니면 적으로 갈라치는 파시즘은 언제든 나타나는 꼴이다.

●헌법대로 총리가 내치 이끌게 하라
우리도 1948년 제헌 헌법을 내각제로 만들었던 비화가 있다. 그렇다고 당장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하자는 건 아니다. 없는 왕을 이제 와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하지만 왕도 아닌 대통령이, 심지어 청와대도 국민께 돌려드렸다면서, 자꾸만 정파적 제왕적이 되는 것은 불길하다. 대통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헌법에 보장된 총리의 권한만 인정해도 내각과 의회가 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앗...민주당에 대한 협조요청도 필요하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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