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前 총리 “파워엘리트 부패 척결은 최종 인사권자의 의지 문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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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김순덕]‘국정은 소통이더라’ 출간 고건 前 총리

“나는 공인으로 살았다. 퇴직 후 기업이나 공기관에서 오라는 것도 안 갔다. 공직에서 혜택을 받았는데 또 뭐가 필요한가.” 고건 전 총리는 전관예우, 전관유턴부터 없애야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도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나는 공인으로 살았다. 퇴직 후 기업이나 공기관에서 오라는 것도 안 갔다. 공직에서 혜택을 받았는데 또 뭐가 필요한가.” 고건 전 총리는 전관예우, 전관유턴부터 없애야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도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어른’이 없는 시대. 지난날 고(故) 김수환 추기경처럼, 나라가 혼란하고 국민이 혼돈스러울 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일러주는 어른이 안 보인다. 정파와 상관없이 50년간 공인(公人)의 길을 걸어온 고건 전 국무총리(75)를 찾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 전 총리는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며 최근에 낸 책 ‘국정은 소통이더라’를 중심으로 말하자고 했다.

7일 자택 부근의 서울 동숭동 음식점에서 만나자마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무슨 소통이냐”고 시비를 걸어봤다.

“6년 전 정치의 뜻을 접으면서 정치에 일절 관여를 안 하겠다고 이미 밝혔다.”

고위공직자 감독기관 재취업 막아야

―관여는 안 하지만 말은 할 수 있지 않나.

“정치는 말하는 거다. 그래서 책 제목도 ‘국정은 소통이더라’라고 붙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소통한다고 하는데 국민은 ‘불통’이라고 느낀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해서 그런 것 아닐까.

고 전 총리는 기자가 답답하다는 듯 하하 웃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2010년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을 마치며 내놓은 ‘사회통합 컨센서스 2010:보수와 진보가 함께 가는 미래 한국’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보고서는 ‘중요한 국가 현안에 국론분열 현상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할 정도이며 적대감으로 가득 찬 진영논리 앞에서 건전한 시민정신이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형국’이라고 현실을 진단하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고 규정한 헌법 4조를 21세기 국가전략과 사회통합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좋은 내용이 많은데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양극화병(病)에 걸려 있다. 여야 양극화에 소득의 양극화, 일자리 양극화, 대기업 중소기업 양극화…. 가장 큰 문제는 국민 대다수가 우리 사회는 불공정하다, 기회 보장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단적인 예로 고위공직자들이 퇴직하고 자기가 감독하던 기관에 고액 연봉으로 재취업해서 정부의 감독 기능을 무력화시킨다. 이것부터 고치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먹고살기 좋아졌는데 왜 부패가 심해지나.

“먹고살기가 좋아지면 부패 병원균도 먹고살기 좋아진다. 전관예우에 ‘전관 유턴’이 거듭되니 파워엘리트의 부패 커넥션이 탄탄해지는 거다. 법과 제도는 필요조건이고, 그런 인사가 있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 대화와 소통을 통한 사회협약의 충분조건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공론장이 필요하고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에서 안 쓰는 게 아니다. 그래도 대통령이 인사를 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최종 인사권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단호한 의지에 달린 거다.”

―참여정부 첫 총리로 장관 임면권을 행사했다는데 지금 정홍원 총리는 못하는 것 아닌가.

“…좌우간 이 시점에서는 인선 기준으로 도덕성이 아주 강화돼야 한다.”

盧정부때 시대가 내게 역할 요구 느껴

―공무원연금 한 달에 얼마나 받나.

“많이 받는다. 500만 원 넘는다. 총리급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세금으로 벌충해주는 공무원연금에 대해 국민 불만이 많다. 관존민비(官尊民卑) 소리 안 나오게 국민연금과 연계하도록 개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해야 한다. 적자도 많은데 고위공직자부터 나서서 공무원연금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별명이 ‘행정의 달인’이지만 악역은 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보고 손에 흙을 안 묻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나도 흙 묻혔다. 참여정부 때 LG-필립스 합작으로 파주에 공장 짓겠다고 할 때, 승인 안 해주면 중국으로 갈 판이었다. ‘재벌 편든다’ 소리를 듣더라도 필요하다고 보고 앞장섰다. 단 권력에 의해 총대 메는 악역은 하지 않았다. 수서사건 때 한보그룹 특혜에 맞섰다가 서울시장에서 경질된 것이 그 예다.”

―그 한보사태 ‘마무리 투수’로 1997년 총리직을 맡은 뒤 대검 중수부장 교체를 건의했더라.

“국민이 검찰 수사를 불신하니 철저한 수사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를 구속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관련 수사를 불신하는 시선이 있다. 지금 총리라면 어찌 할 건가.

“그 문제는 초기에 호미로 막아야 할 기회를 놓쳤다.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정치 갈등의 한쪽 당사자가 되어선 안 되고,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입장에서 신속히 처리했어야 했다.”

―책에 고 전 총리가 내무부 시절인 1969∼1971년 서울 철거민 12만6215명을 경기 광주대단지로 이주시킨 얘기가 나온다. 강제이주로 후유증이 컸다. 그때의 집단기억이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된 이석기 국회의원 등 강경주사파 경기동부연합을 키웠다는 학술논문이 나온 것을 알고 있나.

“일리 있다. 개발행정시대의 부작용이 그대로 응축된 곳이기 때문에 사회 불만 요인이 양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통진당 해산 청구를 ‘종북몰이’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다원화사회니까 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큰 강물은 지류에서 약간의 오염원이 들어오더라도 희석이 된다. 그러나 심하면 하수처리장을 만들어 오염을 제거해야 한다.”

―고 전 총리가 대통령이 되면 잘할 텐데 후보로서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념과 관계없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책을 부작용 대책까지 포함해 집행했을 테니까.

“그게 민주주의의 딜레마다. 뽑히는 능력과 일하는 능력과의 간격이 있다.”

―2004년 후반부터 ‘고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2005년에는 지지율이 30%를 넘었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위헌심판으로 권한정지를 당했다가 돌아오면서 나는 사표를 내고 나와 조용히 있었는데도 그런 여론조사가 자꾸 나왔다. 아, 나한테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할이 있구나, 짊어질 수밖에 없는 소명의식을 느끼게 됐는데 정당이 없었다. 중도개혁 실용의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고 제3의 길을 주장하면서 통합연대를 시도했다. 정치권에다 새 정치를 위해 기득권 내려놓고 원탁으로 나오라고 했다.”

통합연대 시도… 안철수의원과 닮은듯

―안철수 의원과 비슷하다.

“호감을 보이는 정치인들 많이 만났다. 결단을 못하더라.”

―누가? 고 전 총리가 결단을 못한 게 아닌가.

“정치인들이다. 나는 열린우리당 가지고는 안 된다, 나오라 했는데 총선이 2년 이상 남았을 때였다. 그들은 미리 위험 감수를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현역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마지노선을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인 2007년 1월로 잡았다. 국민에게 생각할 기회와 선택권을 줘야 하고, 또 정치인으로서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1월 16일 불출마 선언 때 동아일보 1면 톱 제목이 ‘고(高) STOP’이었다.

“불출마 선언 뒤 사흘간 남해안을 돌다 돌아왔더니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사가 와서 번의하라고 했다. 나를 지지한다는 의미다. 정당정치인이었다면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체제를 신장개업해서는 당선은 무망했다. 당시는 잃어버린 10년, 그러니까 보수의 잃어버린 10년, 영남의 잃어버린 10년이 겹쳐서 도저히 안 된다고 봤다. 낙선은 당연하다 해도 5년 후를 보고, 내가 정당을 혁신할 수 있다면 했을 텐데 추동력이 없었다. 5년만 젊었으면 몰라도….”

―지금 안 의원에게 가는 현역 의원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 듯하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가 관건이다. 당시는 잃어버린 10년을 찾으려는 열망이었고 지금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이 또 나오는 거다. 꼭 대통령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는 기존 정당 체제에 대한 실망일 것이다.”

公先私後 공인의식 있어야 정책 성공

―왜 정치는 계속 국민을 실망시키나. 국민을 잘 살게 해주는 게 정치일 텐데….

“50년 전에 고시공부를 한 것은 군수를 하고 싶어서였다. ‘목민심서’에 쓰인 대로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드는 좋은 군수가 되고 싶었다. 그때는 군수가 되려면 고시를 해야 했다. 지금은 선거니까 군의회 의원으로 나가 봉사부터 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회의원 나오려고 했겠지. 하하.”

―큰 의미에서 행정도 정치라고 책에 썼다. 의회에서 하면 정치, 정부에서 하면 행정이라고….

“공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열정이다. 행정에는 최소한 36.5도의 온도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온도가 옮겨 간다.”

―젊은 세대의 가장 큰 꿈이 고시 합격이다. 그 어려운 고시에 합격해 놓고 왜 열정이 식나.

“인사가 중요하다. 일하는 줄 따로 있고, 인사하는 줄 따로 있으면 공무원들이 일 안 한다.”

―공인의식이 없는 것 아닌가. 공직을 통해 사익을 취하고….

“그건 좀 심한 말이고…. 공인이란 무엇인가, 책을 쓰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은 공선사후(公先私後)를 말했다. 개인의 욕구는 다 다르지만 공동체의 욕구가 있다. 공동체를 위한 열정, 그게 공선사후이고 공인의식이다. 나는 공인으로 살았다.”

―평생 부모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으로 살아온 것 같은데. 사람들이 고건 인터뷰는 재미없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생각해 봤다. 전주북중을 다닐 때 최고의 주먹, 요즘말로 일진한테 맞짱 뜨자고 했다. 결국 내 맘대로 얻어맞았지만. 이튿날 학교 갔더니 전부 외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라. 일진에 이겨서 유명해진 게 아니라 도전해서 유명해졌다. 하하.”

현실정치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안 하는 듯, 할 말을 다 하고 말았다. 공동체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마음 한쪽에서 끓고 있는 것 같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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