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美日中과 ‘깍두기’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9월 24일 17시 06분


어릴 적 고무줄놀이에 ‘깍두기’라는 게 있었다. 이쪽저쪽 양편에서 뛰는 특별 선수다. 어디 끼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정도로 잘하거나, 거꾸로 아무도 같은 편 되기를 원치 않을 만큼 별 볼일 없을 때 깍두기의 운명이 주어진다.
미국 전략문제연구소와 맨스필드재단 주최로 한중일 관계를 논하는 전문가집단 토론회에 참석한 느낌은 딱 불행한 깍두기였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과 경제대국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자꾸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었다. 특히 우리에게서 미국이라는 ‘후광’이 줄어드는 지금, 한국이 깍두기로라도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격변의 동북아 속 한국의 위상▼
2002년부터 같은 참가자들이 3년째 만나는 프로그램인데 분위기는 지난해와 확연히 달랐다. 경제 정치적으로 세를 얻어가는 중국 참가자들은 자신만만했고 오랜 침체에서 벗어난 일본측도 쾌활했다. 우리라고 기죽은 건 아니지만 내세울 게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계속하는 건 전쟁 만행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뜻이다. 고이즈미가 바뀌지 않는 한 중일 관계의 발전은 없다.”(중국)
“우리도 총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도 아시아축구경기 때 일본에 모욕을 주지 않았나. 그건 잘못된 민족주의다.”(일본)
중일 관계는 악화된 것이 역력했다. 정치인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데 속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한국측이 나섰다.
“중국은 일본에는 역사왜곡을 항의하면서 왜 고구려가 중국역사라고 왜곡하나. 모순 아닌가.”
그러자 뜻밖에 양쪽에서 반응이 쏟아졌다.
“고구려 문제는 학자들의 주장이지 중국인은 알지도 못한다. 한국은 일본에 역사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면서 왜 중국에는 문제 삼나.”(중국)
“한국에서 친일과거사 규명하는 건 또 뭔가. 마녀사냥으로 한일 관계가 금갈 수도 있는데 이율배반 아닌가.”(일본)
오늘의 동아시아 정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을 연상케 한다. 인접국에 대한 불만과 경쟁심을 불태우는 화약고 같다. 앙심을 숨긴 경제교류는 ‘거품 협력’과 같아서 언제라도 터질 위험성이 있다.
중국이 경계하는 것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다. 부국강병책도 일본 견제를 위해서라고 인민일보는 강조했다. 일본은 중국시장 덕분에 경제가 살아났다고 여기면서도 중국을 잠재적 안보위협국으로 본다. 북핵에 이어 ‘남핵’까지 드러나자 일본이 더 강해져야 한다는 민족주의가 젊은층 사이에 부글거리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미국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에선 영향력이 줄어들었다지만 미군이 버티고 있어 두 나라의 지나친 군사경쟁을 막을 수 있었다.
겁날 게 없어 뵈는 강대국들도 외교에 신경 쓰는 건 결국 제 나라 경제를 위해서다. 상호의존을 피할 수 없는 세계화 시대, 일본과 중국은 특히 미국과의 좋은 관계가 동아시아 안정은 물론 경제라는 국익에 직접적 이득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홀로서야 할 상황이 오고 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이 설자리는 어딘지 난감해지고 있다. 동북아 경제중심? 내 나라 기업들도 힘들다고 나가는 판에 턱도 없는 소리다. 북한을 더 이상 위협으로 안 보면서부터 북한을 핵 확산의 최대 위협으로 치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는 어그러졌다는 지적이 파다하다.
구 소련이 사라지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도 예전 같지 않다. 중국과도, 일본과도 불씨를 안고 있는 상태가 됐다. 만에 하나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터질 경우 누가 우리를 도울지, 우리는 어느 편에 설지 답답해진다. 행사를 주최한 미국인 한반도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인들은 지나친 자신감에 자신의 위치를 잊었다. 지금까진 미국이 가까이 있어 한국은 실제에 비해 크게 대접받아 왔다. 이제 한국의 지도층이 세계 정세에 무지했던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한국이 어쩔 수 없이 홀로 서야만 할 상황이 되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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