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제 머리 못 깎지만, 깎일 머리는 제 것… 타자 경유한 자기 구원[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동아일보
입력 2026-05-24 23:002026년 5월 24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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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하인츠 가일푸스(1890∼1956)의 그림 ‘마음을 치유하다(Repairing Hearts)’.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은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가 지난 주말 종영했다. 이 드라마에서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깃든 무가치함과 레슬링 중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인간은 무가치함과 싸우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보다 나은 것을 상상하게끔 진화해 온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완벽한 신이라면 그런 싸움은 불필요하다. 그 자신이 바로 완벽한 가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이 일개 사물이어도 그런 싸움은 불필요하다. 스스로 자기계발에 나서는 사물은 없기에.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보다 나은 자신이 되기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 황동만(구교환 분)과 변은아(고윤정 분)는 유난한 구석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무가치한 존재라는 낙인이 깊이 찍힌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싸움이 한결 치열하다.
영화감독 지망생 황동만은 무려 20년간 데뷔를 하지 못했다. 20년 내내 선후배들이 차곡차곡 데뷔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것은 영화계로부터 “너는 무가치하다”라는 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 영화사 프로듀서 변은아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버려졌다. 누구보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그 사람으로부터 유기(遺棄)된 경험은 “너는 실로 무가치하다”라는 사형 선고와 다를 바 없다.
이제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일로 자기 일생을 소진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무시해 온 세상에 복수해야 한다. 황동만은 세상을 놀라게 할 시나리오를 써서 멋지게 데뷔해야 하고, 변은아는 그 잘난 엄마보다 더 잘난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이들은 과연 천형처럼 주어진 이 인생의 숙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인가.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며 서로를 구원한다. 변은아는 남들이 모르는 황동만 시나리오의 가치를 알아보고 소중한 피드백을 준다. 그 결과 황동만은 감독 데뷔에 성공한다. 황동만 역시 변은아의 아픈 과거에 깊이 공감함으로써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구원한다. 만세!
그것이 상호 구원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자력구제론에 대한 반론이다. 즉 “구원은 셀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드라마에서 자력구제론을 대변하는 사람은 변은아의 엄마 오정희다. 오정희에게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봉지쌀 사 먹던 집구석에서 비 오는 날 봉지 터져서 길바닥에 다 흘리고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처마 밑에서 울던 아홉 살 오정희는 어떠니? 술 취한 애비가 밥상에 식칼을 내려꽂은 게 오정희 생애 첫 기억이라면?” 오정희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무용한 타자들을 버리고 유용한 타자들을 이용해 가면서 자력으로 기어이 대한민국 원톱 여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녀에게는 실로 “구원은 셀프”였다. 그러나 그 결과 그녀는 친딸의 빌런이 되고 말았다.
이 드라마는 자력구제론뿐 아니라 타력구제론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타력구제론을 대변하는 것은 변은아의 전 남자친구 마재영이다. 마재영은 황동만을 제치고 영화진흥협회 제작지원사업에 당당히 당선된다. 그러나 그 시나리오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마재영이 아니라 바로 변은아가 썼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마재영은 그 사실을 애써 숨기고 성공하려 든다. 즉 타인의 힘에 의존해서 자신을 구제하려 든다. 그러나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 마재영의 계획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렇게 이 드라마는 타력구제론을 명백히 거부한다.
아니, 자력구제도 아니고 타력구제도 아니라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원받았단 말인가. 구원 과정에서 황동만에게 변은아가, 변은아에게 황동만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구원 과정에는 타력구제의 면모가 분명히 있다. 어떤 중이 스스로 자기 머리를 깎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는 타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깎는 그 머리통만큼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
변은아가 황동만의 가치를 알아보고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고 한들, 그 시나리오를 쓰고 완성한 사람은 결국 황동만이다. 그 점이 마재영과 황동만의 결정적 차이다. 황동만과의 사랑에 힘입어 피 흘리는 어린 자신을 구제한 사람 역시 변은아 자신이다. 오정희는 자기 구제를 위해 타자를 이용했다면, 변은아는 타자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자신을 구제했다. 그 점이 양자의 결정적 차이다.
1500년경 독일에서 제작된 한 필사본 내 삽화. 상처 난 상대방에게 자신의 심장을 내밀어 구원하는 이미지를 담았다. 사진 출처 김영민 교수결국 변은아와 황동만은 타인과의 사랑을 경유해서 스스로를 구원한 경우다. 변은아는 어두운 과거 속에 버려져 있는 어린 자신을 스스로 구원했고, 황동만은 무능의 늪에 빠져 있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했다. 그 구원 과정에서 타자는 꼭 필요했다. 그 구원의 손길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강함을 과시할 때보다는 취약함을 드러낼 때 왔다. 기어이 바닥을 보고야 말았을 때, 비로소 구원의 손길이 왔다. 이 드라마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라면, 여주인공이 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드러낸 취약점을 이용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사랑의 질료로 삼았다는 데 있다.
안드레아 살바토리의 조각 ‘커다란 머리(Testone·2016년)’는 “머릿속에서 네 생각이 떠나질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드레아 살바토리 홈페이지
안드레아 살바토리의 조각 ‘커다란 머리(Testone·2016년)’는 “머릿속에서 네 생각이 떠나질 않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드레아 살바토리 홈페이지자, 그 사랑 덕택에 자신의 무가치함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는가? 그렇다면 긍지와 명예와 자존감과 행복이 회전초밥처럼 밀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인생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자신의 유가치함과 싸워야 한다. 인정을 갈구하는 자신이 징그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타인의 불행 속에서도 자신의 성취를 의식하는 마음이 징그러워지는 순간이 온다. 황동만이 “좀 몰입하면 안 되냐? 처음 느끼는 행복인데”라고 말할 때, 동만의 형이자 한때 인정받았던 시인 황진만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에 너무 몰입하지 마라. 행복에도 몰입하지 말고, 불행에도 몰입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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