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고 싶다”더니 너무 자주 등판하는 文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0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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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지난 10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나 나눴다는 대화 내용이 더불어민주당 내에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박 전 원장은 17일 YTN 라디오에 나와 “문 전 대통령은 ‘민주당이 총단합해서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 이 대표 외에 대안도 없으면서 자꾸 무슨’ 정도의 얘기를 했다”라고 말했죠.

지난 10일 경남 양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를 찾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문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박 전 원장 SNS
지난 10일 경남 양산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를 찾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문 전 대통령과 찍은 기념사진. 박 전 원장 SNS
이에 비명(비이재명)계가 즉각 반발하고 나서면서 ‘문심’ 진위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5선 중진 이상민 의원은 “문 전 대통령이 과도하게 말한 것이고 전달한 분도 잘못 전달한 것”이라며 “우리가 뭐 문 전 대통령 ‘꼬붕’이냐”고 불쾌감을 드러냈죠.

박용진 의원은 아예 17일 경남 양산 사저로 찾아가 문 전 대통령과 직접 나눈 대화를 공개했습니다. 두 의원의 오늘 아침 라디오 발언을 한 번 보시죠.

[20일 오전 CBS라디오]

▷진행자 : 이재명 대표의 이 자도 안 나왔습니까?
▶박용진 : 얘기 안 했었습니다.
▷진행자 : 없었어요? 그러면 박 전 원장하고는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신 모양이에요. ‘이재명 대표 외에는 대안도 없으면서 무슨…’
▶박용진 : 네, 두 분께서 말씀을 어떤 말씀 나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문제로 전직 대통령과 얘기하는 거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고 말씀이 혹시 나왔더라도 그걸 굳이 그럴 필요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왼쪽)이 지난 17일 경남 양산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를 찾아 문 전 대통령에게 책을 선물하고 있는 모습. SNS 캡처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왼쪽)이 지난 17일 경남 양산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를 찾아 문 전 대통령에게 책을 선물하고 있는 모습. SNS 캡처

[20일 오전 SBS라디오]

▷진행자 : 박 전 국정원장이 문 전 대통령을 만나고 왔는데 “지금 이재명 대표 외에 대안도 없으면서 무슨…”이라고 했다면서 당의 단합을 주문했다고 했는데요. 박 의원은 문 전 대통령이 “민주당이 달라지고 뭔가 결단하고 그걸 중심으로 화합하면 국민 신뢰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얘기했다는 겁니다. 박 전 원장하고 박 의원이 전했다는 문 전 대통령의 말이 조금 뉘앙스가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이상민 : 그렇지요. 박 전 원장이 전하는 내용은 이재명 대표 중심으로 단일대오로 하라는 것이고, 박 의원이 전한 내용은 그런 내용은 전혀 없고요. 지금 민주당 사정상 이재명 대표의 거취 문제가 중요한 제일 큰 현안이거든요. 문 전 대통령이 어쨌든 저희 당에 영향력이 있는 분인데 그분이 그 말을 했다는 것과 그게 없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지요.
▷진행자 : 문 전 대통령의 의중은 어디에 방점이 더 찍혀 있다고 보세요?
▶이상민 : 박 전 원장이 없는 얘기 하실 분도 아니고, 박 의원도 그대로 전했을 테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문 전 대통령이 그런데 쉽게 그런 얘기를, 당의 중대한 현안이 되는 문제를 어느 쪽이라고 딱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을 표명했을까 라는 생각인데요. 만약에 했다면 (전) 대통령으로 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지금 당내 중대한 현안이 있어도 당내에서 아주 치열한 논의가 있어야 되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문재인 전 대통령처럼 영향력 있는 분이 딱 그렇게 해버리면 완전히 기울어버리지요. (중략) 설사 박 전 원장이 문 전 대통령과 말씀을 나눈 게 있다 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말씀은 어쨌든 영향력이 크고, 미묘한 문제이니까 사실은 밖에 얘기할 성질은 아니지요.
결국 이재명 대표가 이번 주 중 기소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문 전 대통령이 이 대표에 힘을 실어줬느냐, 아니면 민주당의 변화와 결단을 주문했느냐가 논란의 관건입니다. 퇴임 후 여전히 야권 내 최고 ‘슈퍼스타’인 문 전 대통령이 어느 쪽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야권 내 여론 흐름이 크게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다들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죠.

과연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이 외부로 전달될 지, 그리고 전달됐을 때 그게 어느 정도 파장을 불러올 지 몰랐을까요. 여의도 생활을 짧게라도 해 보신 분들은 다들 공감하겠지만 정치인들의 말은 모두 철저하게 계산된 겁니다. 의도나, 목적이 없는 발언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떠드는 정치인은 없습니다. 설령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머릿 속엔 분명한 발언의 목표가 있다는 겁니다.

문 전 대통령도 분명히 자신의 발언이 일으킬 파장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 겁니다. 물론 스스로를 계속 노출시키는 건 본인 자유입니다. 문제는 퇴임 후로도 1년 가까이 이어지는 그의 정치 현안 관련 발언들이 매번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심’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진 건 이번뿐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8월 전당대회 직후 양산 사저로 찾아온 이재명 대표 등 민주당 신임 지도부에게 문 전 대통령은 “요즘 정부·여당이 잘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일신하고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이기는 정당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흡사 ‘상왕’ 같은 발언입니다.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오르는 던 날엔 9·19 군사합의 4주년 기념 토론회에 보낸 축사에서 “정부가 바뀌어도 남북 간 합의는 마땅히 존중하고 이행해야 할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퇴임 후 첫 대북 관련 언급으로,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직후 경남 양산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서로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 승리한 직후 경남 양산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서로 손을 잡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동네 책방지기’로의 데뷔를 앞둔 그의 책 추천을 둘러싸고도 꾸준히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지난해 6월 ‘짱깨주의의 탄생’을 추천하면서 “언론이 전하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강제 북송 논란이 한창이던 7월엔 “현 정부 인사들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라며 ‘지정학의 힘’을 추천했죠.

올해 2월엔 ‘조국의 법고전 산책’에 대해 “저자의 처지가 어떻든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입니다. 학자이자 저술가로서 저자의 역량을 새삼 확인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라고 썼습니다. 한 야권 관계자는 “이게 조국을 (한 방) 먹이는 건지, 진짜 추천하는 건지 눈을 의심했다”라고 했습니다.

대통령까지 지낸 국가 원로라면 국익이나 민생, 협치에 대한 원론적 이야기도 최대한 자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할 때마다 논란이 되는 걸 이미 1년 가까이 충분히 경험하고도 계속 이어간다는 건 결국 ‘정치행보’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니 국민의힘에서도 “퇴임한 대통령이 거대야당 섭정 노릇을 해서야 되겠냐”는 비판이 나오는 겁니다. 권성동 의원은 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박 전 원장의 전언이) 사실이라면 전직 대통령까지 이재명 대표를 위한 방탄에 동참했다”고 비판했죠. 그는 “자기변명 식 독후감 쓰기, 반려견 파양 논란 후 보여주기식 반려견 장례식, 민주당 인사들과의 릴레이 면담 등 본인의 일상 자체를 중계하다시피 했다. ‘트루문쇼’를 방불케 한다”고도 썼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잊혀진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거듭 얘기했습니다. 물론 지난 1년 가까이 이어진 그의 행보를 보면 되레 잊혀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합니다만, 지나간 것은 또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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