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중 맨 먼저 만들어지는 기관은…뇌도 심장도 아닌 ‘이것’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30일 11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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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1505년에 완성한 프레스코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저자는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태어나고, 집어삼키고, 배설하고, 뚫고 들어가고, 낳고, 매장되고, 되살아나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생애주기가 하나의 구멍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한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제공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1505년에 완성한 프레스코화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저자는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태어나고, 집어삼키고, 배설하고, 뚫고 들어가고, 낳고, 매장되고, 되살아나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생애주기가 하나의 구멍 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해석한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제공
태초에 항문이 있었다. 입도, 뇌도, 심장도 아니다. 인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생기는 기관은 바로 항문이다. 배아가 세포 분열을 하는 초기 단계에서 ‘원구’라는 중심이 생긴다. 태아는 이 구멍을 중심으로 성장하는데, 이 구멍이 태아의 항문이 된다. 뇌와 심장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항문이 태아 발달의 중심축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의 일부이지만 가장 말하기 꺼려지는 곳. 23일 출간된 ‘애널로그’(문학동네)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항문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한다.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저자는 전공 분야인 미학뿐 아니라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을 넘나들며 언제나 인간의 중심축에 있었던 항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태아가 항문을 중심으로 성장하듯 어린 아이 역시 항문을 통해 성장한다. 태어나 처음 스스로 유아용 변기에 올라 변을 본 아이를 떠올려 보자. 아이는 마침내 혼자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비단 성취감뿐일까. 저자는 인간 발달과정을 설명한 정신분석학에서 항문이 갖는 중요성까지 짚는다. 항문은 어린 아이에게 안과 밖, 나와 타자의 경계를 알려주는 핵심 기관이기도 하다. 내 몸 안에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는 항문을 통해 몸 밖으로 배설된다. 이때 밖으로 배설된 변은 부모가 버려야 하는 쓰레기다. 저자는 “항문을 경계로 가치가 전도되는 과정을 깨닫게 된 아이는 훗날 누군가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무언가를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어른이 된다”고 강조한다.

항문은 미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화두였다.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1926~1997)는 1956년 발표한 시 ‘울부짖음(Howl)’에 대한 주석에서 ‘세상은 거룩하다. 영혼은 거룩하다. 살도 거룩하다. 코도 거룩하다. 혀와 성기와 손과 항문도 거룩하다’고 썼다. 일찍이 항문의 거룩함을 깨달은 그는 60대가 된 1980년대에는 아예 ‘괄약근’이란 제목의 시를 발표했다. 벨기에의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빔 델보예는 자신이 묵는 호텔 메모지에 립스틱으로 항문 자국을 찍은 ‘항문 키스’ 연작을 2011년 발표해 항문에 대한 편견을 부쉈다. 저자는 “예술가들은 항문이야말로 인간의 공통분모이며, 인간의 본질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 보여줬다”고 풀이한다.

벨기에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빔 델보예가 2011년 발표한 ‘항문 키스’ 연작. 저자는 “빔 델보예는 배설물에 관한 측면을 넘어 항문이 인간의 공통분모이며 본질임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줬다”고 평했다. ⓒWim Delvoye
벨기에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빔 델보예가 2011년 발표한 ‘항문 키스’ 연작. 저자는 “빔 델보예는 배설물에 관한 측면을 넘어 항문이 인간의 공통분모이며 본질임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줬다”고 평했다. ⓒWim Delvoye

정신분석학, 미학, 문화인류학 등 다채로운 틀로 항문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하는 이 책의 핵심은 “애초에 인간은 항문이었다”는 것.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항문이 지닌 인류 보편성에 주목한다. 돈이나 권력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취약한 이 구멍은 아주 원초적인 방식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법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어릴 적 ‘똥침’ 당하는 친구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같은 아픔을 느꼈던 것처럼.

“똑같은 밑(항문)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 수 있게 해준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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