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뉴욕 한복판에 울려퍼진 ‘아리랑’…“300명 관객 앞 재즈 공연, 뿌듯”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2일 13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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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재즈 뮤지션 이지혜 인터뷰

3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이지혜 씨.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3일 오후 7시(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

300여 명의 관객들로 가득 찬 객석 앞 무대 한가운데에 한국인 재즈 작곡가이자 빅밴드(12~20인조 재즈 오케스트라) 리더인 이지혜 씨(40)가 섰다. 이곳에서 이 씨가 이끄는 재즈 오케스트라의 공연 ‘Young Korean Artist Series ‘Jihye Lee Orchestra‘’가 열렸다.

미 중형급 이상 규모의 공연장에서 한국인이 이끄는 재즈 오케스트라가 단독 공연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 지난해 발매된 앨범 ‘Daring Mind’의 수록곡 ‘Relentless Mind’로 포문을 연 이 씨는 한국 전통민요를 재즈로 편곡한 ‘새타령’과 ‘아리랑’,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에 대해 쓴 곡 ‘Eight Letters’와 ‘Born in 1935’, 이민자를 향한 위로를 담은 곡 ‘Nowhere Home’ 등 9곡을 연주했다.

공연은 CJ문화재단(이사장 이재현)과 뉴욕한국문화원이 공동 주최했다.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공연 개최를 도와 해외에서의 K콘텐츠의 확산에 기여하겠다는 게 CJ문화재단의 목표다.
●뉴욕 한복판에서 300명 관객 앞 공연
3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에서 18인조 빅밴드 ‘지혜리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공연을 펼친 이지혜 씨.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7일 오후 화상으로 만난 이 씨는 아직도 공연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독일 재즈페스티벌에 초청돼 프랑크푸르트에서 매일 공연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버드랜드, 블루노트같은 재즈클럽도 꽉 차야 관객이 100명 안팎인데 전 300명 넘는 관객 앞에서 재즈 공연을 한 거잖아요. 국위선양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한국 재즈 아티스트에 대한 이미지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 같아 뿌듯했어요.”

이 씨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재즈 뮤지션이다.

동덕여대 실용음악과에서 보컬을 전공한 그는 미국 버클리음대 보컬과 재즈 작곡 복수전공을 했고, 맨해튼 음대 재즈 작곡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의 이름을 알린 계기는 지난해 모테마 뮤직 레이블에서 발매한 두 번째 재즈 오케스트라 앨범 ‘Daring Mind.’ 뉴욕타임즈는 이 앨범을 ‘지금 들어봐야 할 클래식 음반’ 5개 중 하나로 선정했다.

스포티파이 연말결산 재즈부문 4위, 영국 가디언 선정 재즈앨범 6위에 올랐다. 올해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앨범상을 수상했다.

3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에서의 공연 후 관객들에게 싸인을 해 주고 있는 이지혜 씨.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이 씨는 그날 공연에서 가장 전율이 왔던 순간으로 ‘Born in 1935’를 연주할 때를 꼽았다. 객석 중간 중간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을 보며 고향에 있는 부모와 팬데믹 기간 돌아가신 할머니가 겹쳐보여서 였을까. Born in 1935를 연주하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의 삶에 대해 쓴 곡을 연주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에요. 그 위로와 감동의 감정이 공연장에 가득했다고 생각해요. 공연장을 찾은 많은 한국 동포 분들은 모두 다른 배경에서 왔지만 우리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은 같아요. 직접적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그 음악에 담긴 한국적인 혼을 관객들도 느낀 것 같아요.”

3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이지혜 씨.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나’와 ‘시대’를 동시에 말하는 뮤지션, 이지혜
중학생 때부터 작곡에 관심이 컸던 그는 집에 있던 유일한 악기였던 리코더로 코드를 바꿔 만화 주제가를 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베이스를 치던 친구를 만나 음악에 입문한 그는 독학으로 화성학을 공부해 동덕여대 실용음악과에 진학한 뒤 보컬리스트 교육을 받았다.

싱어송라이터 ‘지요’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해 2007년 첫 싱글 ‘개화’로 데뷔했고, 2010년 ‘갈림길’ 등 네 곡을 묶어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안정적인 한국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2011년 혈혈단신으로 미국 뉴욕행을 택한 이유는 공허함 때문이었다.

“도달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가야할 목적지가 보이면 계속 가는데, 한국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면서 제가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던 찰나에 대학 교수님이 외국에 나가서 제대로 음악을 공부해보라고 권하신게 게 유학을 떠난 계기가 됐죠.”

미국에서 재즈 작곡을 공부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빅밴드로 향했다.

2015년 버클리음대 스승인 그레그 홉킨스 교수, 관악 파트 학과장 등 버클리 음대 교수로 구성된 18인조 밴드를 꾸렸고, 1년 반 동안 8개의 빅밴드 곡을 썼다.

빅밴드는 피아노, 베이스, 드럼에 더해 관악기인 트럼펫, 트럼본, 우드윈드로 구성된 12~18인조 관악 밴드다. 악기가 많기에 작곡이 어렵고 밴드를 꾸리거나 앨범을 발매하는 비용도 많이 든다. 2~5인조 소규모 재즈 밴드에 비해 인지도도 떨어진다.

“내 팔레트에 물감이 한 개 있는 것과 다섯 개 있는 것의 차이랄까요. 물감을 많이 둘수록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어져요. 작곡가에게 물감의 개수를 늘리고 싶은 건 본능인 것 같아요. 팔레트 물감을 하나만 쓸 때와, 전부 다 쓸 때의 다이나믹의 선이 엄청 가파른데,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빅밴드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2016년 발매된 이지혜 씨의 재즈 오케스트라 앨범 ‘April’.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들을 수록했다.

보컬전공의 재즈 작곡가, 미국 뉴욕의 한국인 여성 재즈 뮤지션, 재즈 중에서도 소수인 빅밴드의 리더. 늘 소수자가 되길 자처했기 때문일까. 이지혜의 음악은 ‘나’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시대’를 말한다.

소외된 삶을 살아봤기에 그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소수자를 대변하는 음색을 띈다. 그는 첫 번째 재즈 오케스트라 앨범 ‘April’(2016년)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향한 위로의 곡을 실었고, 차기 앨범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으려 한다.

“미국에 혈혈단신으로 건너와서 내가 뿌리 없이 숨겨진 나무와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위태로울 때 어디에 기대야 하지’라는 생각은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항상 조국과 혈통에 대해 생각합니다. ‘같은 선조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정말 강한 힘을 갖는구나. 나는 결국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요. 그걸 음악으로 풀어내고 싶어요.”

지난해 발매 후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지혜 씨의 앨범 ‘Daring Mind’.

●“내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세계에서 소비되길”
11년 간 뉴욕 재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에게는 달걀로 끼니를 때우며 생계를 걱정해야 했을 때도 있었다. 앨범을 낼 여력이 안 돼 지금까지 낸 정규앨범 2장은 모두 크라우드 펀딩 모금을 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Daring Mind의 성공은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그는 최근 독일의 빅밴드 초청을 받아 재즈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공연을 연다. 빅밴드가 가장 활성화된 유럽 빅밴드 공연은 재즈 뮤지션에게 등용문으로 여겨진다.

“가디언지 4위, 스포티파이 6위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왔지만 하루아침에 일상이 달라지진 않아요. 다만 내가 꺼내놓은 에너지가 내게 돌아와서 나를 새롭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1년 나온 앨범의 에너지가 돌아와서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느낌이죠.”

3일 오후 7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더타임즈센터 공연장에서 이지혜 씨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 뉴욕한국문화원 제공

앨범 ‘Daring Mind‘의 대중적 성공, 미국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의 공연, 독일 빅밴드의 초청까지. 그의 커리어는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지만 이 씨는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기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음악을 쓸 때 남 눈치를 안 보려 해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공공연하게 소비되는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제겐 보컬 출신으로서, 한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겪은 우여곡절이 있어요, 재즈라는 타국의 예술을 통해 나에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세계에서 소비되는 날을 꿈꿉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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