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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타수 속이고… 공 옮기고… “유소년 골프서도 빗나간 승부욕”[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2022-10-04 03:00업데이트 2022-10-0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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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나 ‘오구’로 본 골프 부정
갤러리-중계 없는 유소년 대회… 선수 양심에만 규칙 준수 맡겨
고교 선수 852명-중학생 762명… 프로 진출까진 ‘바늘구멍’ 경쟁
일부 부모들 부정행위 눈감아… 적발돼도 해당대회만 실격
해외선 선수자격 박탈 중징계

김정훈 스포츠부 기자
《윤이나(19)는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가장 관심을 받던 신인이었다. 하지만 경기 도중 자신의 공이 아닌 것을 치는 행위인 ‘오구(誤球·wrong ball) 플레이’로 KLPGA투어 주관 대회 3년간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지난달에는 만 50세 이상 출전하는 한국프로골프(KPGA) 챔피언스투어에서 한 선수가 이른바 ‘알까기’(공이 분실되거나 페널티 구역에 들어갔을 때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새 공을 꺼내 플레이하는 것)를 하다 적발돼 실격됐다.

최근 국내 골프 대회에서 규칙 위반이 잇달아 적발되고 있다. 그동안 쉬쉬해 왔지만 윤이나 사태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계에선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골프계를 이끌어 갈 유소년 무대에서도 규칙 위반 행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 유소년 무대에도 발생하는 부정행위

대한골프협회에 따르면 2019년 송암배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스코어 오기를 한 유소년 선수가 적발돼 실격당했다. 스코어 오기는 자신이 보기를 했음에도 파를 했다고 적는 등 타수를 줄이는 행위다. 2020년에도 빛고을중흥배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한 유소년 선수가 오구 플레이를 했다가 실격됐다. 지난해 열린 서라벌배 전국초등학생골프대회에서는 그린의 볼 마커를 임의로 옮긴 뒤 다시 제자리에 놓지 않고 그대로 퍼팅을 하는 이른바 ‘동전치기’를 하다 적발돼 3개 대회 출전 정지를 받은 선수도 나왔다. 매년 유소년 무대에서 선수들의 부정행위 적발 사례가 나오고 있다. 유소년 골프 관계자는 “대회가 열릴 때마다 선수들이 부정행위를 했다는 신고가 있다”며 “대회 관계자들이 모든 상황을 지켜볼 수는 없다. 신고가 돼도 증거가 없어 적발되지 않을 뿐 부정행위 선수들은 적발된 것보다 더 많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KPGA, KLPGA투어는 거의 모든 대회가 TV로 중계되고, 많은 갤러리가 경기를 지켜본다. 보는 눈이 많아 선수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르긴 쉽지 않다. 그런데 TV중계와 갤러리가 없는 유소년 대회 등은 선수들 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 보통 대회 때 3개 홀당 경기위원이 있지만 모든 선수들을 일일이 지켜보기 어렵다. 또 골프는 다른 종목과 달리 경기를 지켜보는 심판도 없다.

부정행위 신고가 들어와도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면 처벌하지 못하는 것도 선수들의 부정행위가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다. 대한골프협회 관계자는 “부정행위 신고의 90% 이상이 경기를 함께한 선수들이 한다”면서도 “영상 등 증거가 없는 경우 부정행위 신고를 당한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는 한 징계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한국초등골프연맹 주관 대회에서 우승 선수에 대해 함께 경기했던 선수들이 규칙 위반을 신고했지만 증거가 없어 그대로 우승이 인정되기도 했다.
○ 일부만 설 수 있는 프로 투어 무대
프로 투어 무대는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설 수 있다. 올해 10월 기준으로 초등학생 선수는 513명(남 243명, 여 270명), 중학생 선수는 762명(남 353명, 여 409명), 고등학생 선수는 852명(남 474명, 여 378명)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늘어난다. 하지만 KLPGA 1부 투어는 120명 정도만 뛸 수 있다. 1부 투어에서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2, 3부 투어에서 좋은 성적을 내거나 정회원 선발전(매년 10명)을 통과해야 한다. KPGA도 1부 투어에서 뛸 수 있는 선수는 매년 120명 정도다.

국제대회 성적 등에 따라 KLPGA, KPGA 정회원 자격을 주는 국가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히기도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여러 국내 대회에 출전해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올해 국가대표는 남녀 8명, 상비군은 30명 정도다. 국내 투어 한 관계자는 “어렵게 투어 정회원이 돼도 투어 무대에서 상금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선수는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수들도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KLPGA투어와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 활동했던 한 선수는 “한국 선수들은 유소년 때부터 치열한 경쟁 세계에 내몰리고 경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규칙을 위반하면 안 된다 등의 기본 교육 대신 이기기 위한 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어린 선수들의 부정행위를 막아야 할 부모들도 일부 잘못이 있다. 20년 넘게 유소년 골프를 가르치고 있는 한 코치는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프로 투어 선수로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하고, 부모 중 한 명이 아이에게 24시간 붙어 있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며 “이런 걸 보상받으려고 일부 부모들은 아이에게 양심보단 성적에만 집중하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고 했다.
○ 강한 징계와 어릴 때부터 윤리 교육 필요

전문가들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강한 징계로 선수들이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골프 관계자는 “선수들이 규칙 위반을 해도 크게 이슈가 되지 않으면 별다른 징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선수들은 걸려도 큰 제재가 없으니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19년, 2020년 대한골프협회가 주관한 유소년 대회에서 규칙 위반으로 실격당한 선수들은 해당 대회 실격만 당했을 뿐 추가 징계를 받지 않은 사례도 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규칙 위반 뒤 이를 감추거나 속이는 행위를 했을 때 선수 자격 박탈까지 이어진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오구 플레이 등 부정행위 뒤 이를 숨긴 선수에게 무기한 출전정지 처분을 내린다. 디오픈 챔피언십 주최 측인 R&A는 1985년 디오픈 예선 당시 그린에서 공을 고의로 건드려 홀 가까이 붙이는 행위를 반복한 데이비드 로버트슨에게 20년간 출전정지 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고덕호 PGA 아카데미 원장은 “미국에서는 자신이 부정행위를 했을 경우에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실제 사례로 보여주며 어린 선수들에게 윤리 의식을 가르친다”고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8년 미국 노스다코타주 고교 선수권대회에서 개인전 우승을 했던 케이트 윈자다. 스코어 카드를 제출하고 1타를 줄인 것을 알게 된 윈자는 자진신고를 하고 실격당했다. 윈자는 “잘못을 자진 신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골프는 스포츠 종목 중 자신의 양심이 곧 심판이 되는 유일한 종목이다. 일부 선수들의 부정행위가 자칫 세계 무대에서 한국 골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KLPGA투어 관계자는 “골프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신뢰가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오구(誤球·wrong ball) 플레이
경기 도중 다른 선수의 것이든, 예전에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이든 자신의 공이 아닌 것을 치는 행위를 말한다. 오구 플레이를 하면 2벌타를 받는데 다음 티잉 그라운드 첫 스트로크 전까지 자진 신고하지 않으면 대회에서 실격 처리된다. 각 라운드 최종 홀 경기의 경우엔 퍼팅 그린을 떠나기 전에 알리지 않으면 실격당한다.


김정훈 스포츠부 기자 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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