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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횡설수설/이정은] 러 점령지 “병합 찬성” 99%?

입력 2022-09-29 03:00업데이트 2022-09-2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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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집권 연장 여부를 놓고 진행된 주민투표 찬성률은 100%였다. 쿠바에서는 라울 카스트로 공산당 총서기가 2008년 선거에서 99.4%의 지지율을 얻었다. 북한에서 제14기까지 치러진 대의원 선거는 모두 투표율 99%에 찬성률 100%를 기록했다. 직접투표, 비밀투표 등 원칙을 규정해 놨지만 이대로 진행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총칼의 위협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독재 체제를 연구해온 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독재에도 연출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포와 폭력만으로는 권력 유지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받쳐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거와 주민투표를 앞세워 민주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대표적인 연출 기법 중 하나다. 아이티와 콩고, 베트남 등에서도 과거 95∼99%가 넘는 찬성률이 나왔다. 100%를 넘어서는 기이한 투표율로 국제사회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투표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결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에 점령한 지역 4곳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해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찬성률이 최대 99%로 집계됐다고 한다. 투표는 총으로 무장한 러시아 헌병과 선관위 직원이 가가호호 찾아가 투표용지를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투표소에는 러시아 용병기업 와그너그룹의 상징인 해골 모양 마크를 단 군인이 경계를 섰다. 배치된 투표함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박스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투표하지 않는 것은 지하실로 끌려가는 직행 티켓”이라는 게 한 우크라이나 언론이 외신에 전한 분위기다.

▷병합 대상 지역 중 이미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루한스크는 러시아계 인구 비율이 40%에 육박하는 곳이어서 일찌감치 ‘가결’이 예상됐던 곳이기는 하다. 2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러시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 수만 명은 이미 다른 곳으로 탈출한 상태다. 남은 유권자 가운데 투표에 반대하는 이들은 집에 없는 것처럼 커튼을 치고 집에 전등을 꺼놓는 식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침묵은 투표에 반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찬성률은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가 무리수를 써가며 우크라이나 동남부 병합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화력 보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게 정설이다. 병합 지역이 공격받게 되면 ‘영토 수호’를 주장하며 대대적인 총공세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는 새 병합지와의 조약 체결, 병합의 합헌 여부 검증, 의회와의 협의 및 비준 동의, 대통령 최종 서명 등 절차를 준비 중이다. 핵전쟁의 방아쇠가 될 수도 있는 ‘땅따먹기 쇼’가 21세기 지구촌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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