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2차대전 당시 각성제로 활약한 필로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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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백승만/332쪽·1만7000원·동아시아

1893년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최초로 합성한 메스암페타민, 이른바 ‘필로폰’은 원래 노동자의 피로해소제로 널리 쓰였다.

원기를 회복하는 데에 쓰였던 필로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역할이 바뀐다. 군인의 각성제로 사용된 것. 특히 좁고 더운 탱크 안에서 여러 날 잠도 못 자고 진격해야 했던 기갑부대의 전차부대원에게 많이 지급됐다.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군의 전함에 충돌하는 공격 작전을 벌인 가미카제 특공대도 자살 비행 전 필로폰 차를 마셨다고 한다.

전쟁과 약은 서로 맞물린 바퀴처럼 역사에 존재해왔다. 19세기 중반 미국 남북전쟁 당시 모르핀은 진통제로 쓰였지만, 모르핀의 원료 아편은 영국과 중국이 벌인 아편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2001년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이 벌인 전쟁에선 미국 공군이 번쩍이는 불빛을 보고 아군에게 폭탄을 투하한 사건도 있었다. 해당 공군은 각성 효과를 위해 암페타민을 복용했는데, 이것이 지나치게 빠른 반응과 공격성을 유발한 것.

전쟁과 약의 역사를 ‘기나긴 악연’이라 명명한 저자는 경상국립대 약학대 교수이자 천연물과 의약품 합성 연구를 통해 파킨슨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연구자다. 저자는 페니실린, 타이레놀, 아스피린 등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약의 개발 과정을 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연구자의 합리적 설계를 통해 개발된 약보다는 ‘특별한 계기’로 인해 개발된 약이 훨씬 많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 특별한 계기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전쟁과 약의 악연에만 주목하진 않는다. 전쟁을 통해 인간에게 이로운 약을 발견한 사례도 다수 담겼다. 2003년 시작된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에게 보급된 마약류 진정제는 우울증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제로 개량돼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지금 당장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약일지라도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에 따라 언제든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2차대전#각성제#필로폰#악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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