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캐스팅된 이정재, 월드스타로… “언어 중요치 않다는것 증명”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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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美에미상 6관왕]
아시아 첫 ‘에미상 남우주연상’

‘오징어게임’ 주역들이 에미상 시상식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었다. 왼쪽부터 박해수 오영수, 황동혁 감독, 배우 이정재, 제작자 김지연 싸이런픽쳐스 대표, 배우 정호연. 로스앤젤레스=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오징어게임’ 주역들이 에미상 시상식 이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었다. 왼쪽부터 박해수 오영수, 황동혁 감독, 배우 이정재, 제작자 김지연 싸이런픽쳐스 대표, 배우 정호연. 로스앤젤레스=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기대치를 뛰어넘어야 노력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기대치만큼만 하는 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456억 원(‘오징어게임’ 우승상금)을 뛰어넘는 위대한 밤이었다. 연기력 논란이 꼬리표처럼 달렸던 20세기 청춘스타 이정재(50)는 21세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배우로 우뚝 섰다.
○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세상을 거머쥐다

12일(현지 시간) 아시아 국적 배우 최초로 제74회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정재는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모델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할 때부터 외모는 ‘언터처블’이었다. 특히 당시 시청률 64.5%를 기록하며 ‘귀가시계’로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에서 묵묵히 목검을 휘두르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남녀노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대사가 안 돼 말 없는 역할을 맡겼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연기로는 평가받지 못했다.

이정재는 세간의 인식을 정면 돌파했다. 배우 김학철과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최형인 교수를 스스로 찾아가 연기 지도를 받는가 하면, 데뷔 6년 차에 동국대 연극영상학과에 입학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평생의 친구가 된 배우 정우성과 출연한 영화 ‘태양은 없다’(1999년)는 그의 변신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오징어게임 성기훈의 청년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사기꾼 홍기 역으로 제20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도 거머쥐었다.

세기말을 지나며 다소 주춤했던 행보는 2010년 또 한 번 커다란 변곡점을 맞는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주인 남자, 훈’을 연기한 건 당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남자 주인공만 도맡아온 이정재에게 훈은 전도연과 윤여정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가까운 역이었다. 당시 그는 “앞으로 캐릭터의 변화가 익숙한 배우로 기억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
2013년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
그 다짐은 허투루 던진 공염불이 아니었다. 영화 ‘도둑들’(2012년) ‘신세계’(2013년) ‘관상’(2013년) ‘암살’(2015년) ‘신과 함께-죄와 벌’(2017년) ‘신과 함께-인과 연’(2018년)…. ‘천만영화’만 4편에 이르는 흥행 보증수표이자 “내가 왕이 될 상인가”(‘관상’)라는 대사가 유행어로 퍼지는 연기 보증수표가 됐다. 오징어게임의 성공은 그런 그가 끝없는 담금질을 통해 내놓은 결과물이었다.
○ 배우에서 감독, 월드스타로…신세계를 열다
“연기자는 꼭 언어로만 표현하는 게 아닙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오늘 수상으로 증명된 거 같습니다.”

“이정재 수상 축하” 여우주연상 후보의 환호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이정재(왼쪽)가 무대에 오르기 전 
할리우드 배우 엘 패닝과 양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눴다. 드라마 ‘더 그레이트’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엘 패닝은 ‘오징어게임’의
 열렬한 팬임을 밝히며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이정재 수상 축하” 여우주연상 후보의 환호 에미상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호명된 이정재(왼쪽)가 무대에 오르기 전 할리우드 배우 엘 패닝과 양손을 맞잡고 기쁨을 나눴다. 드라마 ‘더 그레이트’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엘 패닝은 ‘오징어게임’의 열렬한 팬임을 밝히며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영어가 아닌 연기로 어떻게 에미상을 받을 수 있었는가’라는 해외언론의 질문에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은 이정재가 그간 얼마나 공력을 쌓아 왔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에미상 시상식이 열린 미 로스앤젤레스(LA) 마이크로소프트극장 인근 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이야기나 주제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기에 (그걸 전하는) 메시지나 주제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날 에미상 무대에서 마지막 소감을 한국말로 전한 것도 그의 뚝심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의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왔다. 흥행이 잘될 때도, 관객의 마음에 안 들어도 다음 작품을 위해 노력하기에 (한국 관객에게) 꼭 인사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징어게임에서 보여준 성기훈의 연기는 이정재가 30년 가까이 걸어온 배우 인생의 총체와도 같았다. 정의로운 염라대왕(신과 함께)과 비열한 친일파 배신자(암살)를 넘나들며 온갖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스크린에 담아온 그에게, 도박중독에 빠진 이혼남이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성을 지키는 기훈은 이정재라는 배우의 역사 한 페이지를 확실하게 매조지하는 연기였다.

이정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최근 감독으로 첫 연출을 맡은 영화 ‘헌트’는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돼 기립박수를 받았다. 13일 기준으로 420만 명이 관람했다. 할리우드에서 ‘스타워즈’의 드라마 시리즈인 ‘어콜라이트’(디즈니플러스 제작)에 주인공으로도 캐스팅됐다. “대한민국 관객에게 고맙다”고 했던 이정재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워하는 대체불가 배우로 자리 잡았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로스앤젤레스=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이정재#오징어게임#에미상 남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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