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철희]北 ‘핵 숭배’ 법령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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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핵실험의 거대한 폭발을 지켜본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관제소 안 기둥을 붙들고 힌두교 경전의 구절을 떠올렸다. “천 개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하지만 뒤이어 그의 머릿속에 들어온 다른 구절은 이랬다.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은 전율과 경외를 부르지만, 그것이 가져올 참상은 경악과 공포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핵은 우리의 국위이고 국체이며 공화국의 절대적 힘이고 인민의 크나큰 자랑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정의한 북한 핵무기의 위상이다. 한때 ‘만능의 보검’이라 불리던 핵무기는 어느덧 ‘국위이자 국체, 절대권력’이 됐다. 흔히 주권을 누가 가지느냐에 따른 국가 형태를 국체(國體)라 하는데, 이제 북한은 인신(人神)인 독재자 수령에 더해 물신(物神)인 핵무기까지 숭배하는 핵·수령 일체국가가 됐다.

▷북한은 국가 법령으로도 핵이 곧 김정은임을 거듭 천명했다. 새 법령은 ‘핵무력은 국무위원장의 유일적 지휘에 복종하며, 국무위원장은 핵무기와 관련한 모든 결정권을 가진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핵무력 지휘통제 체계가 위험에 처하는 경우 핵타격이 자동적으로 즉시에 단행된다’고 밝혔고, 5가지 핵 사용 조건을 통해 핵공격의 문턱을 대폭 낮췄다. 그게 오판이든 변덕이든 김정은의 결심에 따라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핵무기 운용 체계를 만든 것이다.

▷북한 핵무기는 이제 할아버지의 주체사상, 아버지의 선군정치를 뛰어넘는 김정은의 위업이 됐다. 더욱이 모래탑 같은 선대의 사상적 업적과 달리 김정은이 만들어낸 것은 핵탄두와 미사일이라는 유형의 실체가 있는 성과물이다. 당장 휴전선 너머 같은 민족은 물론 멀리 바다 건너 강대국까지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 국가임에도 사교집단 같은 광신적 수령 숭배와 가혹한 감시·억압으로 지탱되는 체제에선 앞으로 핵 숭배를 위한 법제화를 넘어 각종 교리와 상징체계, 비의(秘儀)까지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다.

▷김정은은 일찍이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미국을 위협했다. 이에 전임 미국 대통령은 “내겐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며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비록 ‘말폭탄’이었지만 예측불허의 지도자 손에 쥐어진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논란을 불렀다. 머지않아 김정은에게도 미국과 러시아처럼 늘 곁에 묵직한 핵가방이 따라붙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위험한 핵전쟁 격발장치는 외려 정권의 자폭장치가 될 공산이 크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북한#핵무기#핵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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