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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곤충은 알고 있다, 억울한 죽음의 흔적을…

입력 2022-08-20 03:00업데이트 2022-08-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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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경찰청 아산 법곤충감정실
국내 첫 법곤충 전문 수사시설
‘파리 구더기’가 중요 단서
《누군가에겐 징그러울 수도 있는 구더기를 종일 들여다보며 망자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이들이 있다. 미국 드라마 ‘CSI’처럼 사건 현장의 곤충을 이용해 사망 시간을 추정하고 실마리를 찾는 경찰청 법곤충감정실을 찾아가 봤다.

“시체에서 나온 파리 유충을 분석해 보니 말라티온이라는 살충제 성분이 나왔다. 이는 파리가 피부에 접촉하는 것을 최대 나흘까지 지연시켜 준다. 즉 피해자가 살해된 날짜는 11월 1일이 아니라 11월 4일이다.” 미국의 범죄 과학수사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 시즌 6’ 6화에서 주인공 길 그리섬 반장은 피해자의 사망 시각을 이같이 추정한다. 극 중에서 그리섬 반장은 곤충학 박사 학위를 받은 법곤충학자다. 사체에서 나온 파리 구더기 등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나 범죄 혐의점을 찾아낸다. 국내 수사에도 ‘미드’에서나 봤던 법곤충감정이 본격화하고 있다.》





곤충으로 밝히는 사건의 진실


법곤충감정실 연구사가 구더기의 DNA를 분석하기 위해 스포이트로 검체를 나눠 담고 있다. 아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올 5월 17일 충남 아산시 경찰수사연수원에 법곤충감정실을 열었다. 이 감정실은 경찰청과 고려대 의대 법의학교실에서 축적한 연구 데이터를 실제 수사에 접목하고자 개설한 국내 첫 법곤충 전문 수사시설이다.

법곤충학을 수사에 활용해 사망 시간을 추정하고 사건 현장에서 발견하지 못한 단서를 찾아내는 수사 시설을 최근 찾아가 봤다. 연구진은 전국 경찰이 보내온 검체를 분석하면서 시간이 지나며 흐려져 가는 죽음의 흔적을 다시 생생하게 만들고 있었다.
○ 형태와 DNA 분석 통해 구더기 종류 파악
지난달 19일 충남 아산 경찰수사연수원 법곤충감정실에서 연구사들이 구더기의 모습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들여다보고 있다. 법곤충감정실에선 현장에서 채취된 구더기의 형태와 DNA를 분석해 구더기의 종류와 성장 정도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망자의 사망 시간을 추정한다. 아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법곤충감정실은 사체에 기생하는 곤충의 성장 정도를 분석해 사망자가 죽은 뒤 지난 시간을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분석에는 시체에서 흔히 발견되는 파리 구더기가 많이 활용된다.

최근 법곤충감정실에서 만난 오대건 보건연구사는 현미경을 통해 구더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책상 한편에는 사람 모양 그림 위에 구더기가 채취된 위치를 상세히 표시한 현장 기록지와 구더기 수십 마리가 담긴 샬레가 놓여 있었다. 오 연구사는 “구더기의 종류와 환경에 따라 성장 정도가 다르기에, 발견된 것이 어떤 종인지부터 면밀히 분석한다”고 했다.

구더기의 종을 파악하는 데는 특히 구더기의 후기문(항문) 모양이 중요 단서다. 오 연구사는 “맨눈으로 봤을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무늬 등이 종별로 차이가 난다”고 했다. 구더기 항문 주변에 돋은 돌기 사이의 거리를 ‘슬릿(Slit)’이라고 부르는데 이 역시 판단의 근거가 된다.

형태 분석에 이어 구더기의 DNA를 유전자 증폭기(PCR)로 분석해 더 정밀하게 종류를 파악한다. 법곤충감정실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견되는 파리는 총 40종. 국내 법곤충감정실은 그중 32종의 DNA 샘플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8종의 DNA에 대해서도 확보 및 연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성장 속도는 현장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 시체에서 흔히 발견되는 ‘구리금파리’ 구더기는 알에서 부화한 후 단계별로 1령, 2령, 3령 순으로 나이를 먹는데 영상 24도에서는 178시간 후 번데기 형태로 진화하고 대략 360시간 후 성충이 된다. 그러나 온도 등 환경에 따라 성충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500시간 이상 차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각 지방청 검시관들은 현장에서 구더기를 채취할 때부터 현장 환경을 면밀하게 기록한다. 검시관들은 현장의 기온과 함께 시체가 발견된 장소의 밀폐 여부, 전열기 및 에어컨의 작동 여부 등을 확인하고, 구더기가 형성된 부위와 채집한 부위도 검시 보고서에 표시한다. 이후 고온의 물에 담가 형태를 보존한 뒤 다시 알코올이 담긴 유리관에 담아 법곤충감정실로 전달한다.
○ 곤충 성장 정도를 분석해 사망 시간 추정
법곤충감정실이 추정한 사망 시간은 사망 원인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단서로 활용될 수 있다.

법곤충감정실은 서울경찰청으로부터 5월 22일 서울의 한 빌라에서 숨진 채 발견된 20대 A 씨의 사례를 감정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A 씨의 몸에는 외상 흔적이 없었지만 경찰이 사인을 명확히 하려면 사망 시점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A 씨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발견된 탓에 사망 시점을 좁히기가 어려웠다. 카드 결제 기록, 영수증, 통신기록 등 생활 반응을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도 없었다.

도움을 요청받은 법곤충감정실은 현장에서 발견된 구더기를 분석했다. 발견된 구더기는 구리금파리였는데, 번데기가 되기 직전인 3령의 성장도를 보였다. 현장 온도는 영상 26도였고, 창문이 열려 있었다.

감정실은 이 같은 상황을 종합했을 때 발견 시점에서 172시간(7일 4시간) 전인 5월 15일경 A 씨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이 시점을 전후로 집 주변 폐쇄회로(CC)TV를 비롯한 주변 흔적을 살피는 데 수사력을 집중한 끝에 범죄 혐의점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경찰 관계자는 “사망 추정 시간을 바탕으로 벌인 수사 결과와 다른 검시 자료를 종합한 결과, A 씨는 지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봤다”고 했다.

5월 27일 경기 양주시 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 30대 B 씨의 사인(死因) 수사에서도 법곤충감정실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 B 씨는 5월 15일 인천의 자택에서 외출한 뒤 가족,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됐다. B 씨의 생전 행적은 5월 17일 양주시청 인근에서 차량이 발견된 게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행적과 발견 시점 사이에는 열흘의 간격이 있었다. 만약 발견되기 직전까지 살아 있었다면 열흘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법곤충감정실 분석 결과 B 씨는 숨지고 6일 이상 지나 발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 시점이 5월 21일 이전으로 좁혀진 것.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은 “마지막 행적과 5월 21일 사이를 집중 수사한 결과 범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며 “법곤충 감식 보고서가 수사에서 중요 자료로 활용됐다”고 덧붙였다.
○ 과거 법곤충 활용 사례들
구더기가 채취된 신체 부위가 표시된 현장 기록지 위에 구더기 수십 마리가 담긴 샬레 용기가 놓여 있다. 아산=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법곤충감정을 활용하면 시신이 장례나 화장 등을 이유로 현장에서 옮겨진 경우에도 최초 시신 발견 지점 인근에 남은 구더기를 채취해 사망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사망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부검이 쉽지 않은 경우에도 사망 시점 추정이 가능하다.

국내에 법곤충감정이 사건 수사에 처음 도입된 건 2014년이다. 그해 6월 12일 전남 순천의 한 야산에서 C 씨가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검시관에 따르면 시신은 부패가 심했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부검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찰은 현장에 남아 있던 구더기와 주변 환경을 고려해 사망 추정 시점을 6월 2일로 결론지었다.

법곤충감정이 유기 또는 학대 피해를 밝혀내기도 한다.

지난해 7월 부산에선 80대 노모가 사망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다. 신고자인 아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눴는데 아침에 갑자기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시 결과 시체가 부패한 정도에 비해 구더기가 크게 성장한 상태였고, 노모의 피부에선 ‘승저증’이 발견됐다. ‘승저증’은 구더기가 살아 있는 동물의 피부에 기생하는 것으로 상처가 났음에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됐을 때 등에 나타난다. 경찰은 이를 통해 아들이 병든 노모를 제대로 간호하지 않고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입증했다.

법곤충감정실은 개소 후 약 3개월이 지난 이달 18일까지 전국 지방경찰청으로부터 감정 의뢰를 받은 42건에 대한 감정 보고서를 제출하며 사망 시간 추정과 사망 원인 규명에 기여했다. 초기이다 보니 살인 등 강력사건을 감정한 사례는 아직 없다고 한다. 오 연구사는 “향후 현장의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숨겨진 범죄 혐의점을 확인하는 한편 억울한 죽음도 밝혀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산=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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