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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책의 향기]기술 진보의 극단, 무너지는 인간의 정체성

입력 2022-08-20 03:00업데이트 2022-08-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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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한 이유/그렉 이건 지음·김상훈 옮김/532쪽·1만8500원·허블
끔찍한 사고로 만신창이가 된 한 남자가 있다.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고, 그는 복제인간을 만들어 뇌를 갈아 끼우는 ‘복제 몸 수술’ 보험도 들어 놓았다. 문제는 몸이 완성되기까지 2년 동안 뇌를 보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것. 고민에 빠진 아내에게 보험사 직원은 “저렴한 방법이 있다”며 아내의 자궁에 뇌를 보관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남편을 살릴 유일한 길이었기에 여자는 2년간 남편의 뇌를 마치 태아처럼 자신의 자궁에 보관한다. 복제 몸이 완성되자 자궁에서 뇌를 꺼냈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다.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인간성을 잃었고, 그 탓에 불구나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

16일 출간된 SF 단편집 ‘내가 행복한 이유’의 첫 번째 소설 ‘적절한 사랑’의 이야기다. 책은 대학병원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저자가 쓴 SF 단편을 모았다. ‘적절한 사랑’처럼 육체와 의식을 동시에 파고드는 과학기술,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현존하는 최고 SF 작가로 꼽히는 테드 창과 함께 ‘하드 SF계의 양대 산맥’이라 불린다. 하드 SF란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SF 소설이다.

표제작 ‘내가 행복한 이유’도 과학기술로 인해 신음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 주인공은 죽어버린 행복 뇌세포를 되살릴 수 있다는 의사의 제안으로 인공 뇌를 이식받는다. 하지만 인공 뇌는 4000명의 뇌 데이터를 집적해 만든 것이었기에 주인공은 혼란에 빠진다. 4000명의 취향이 모두 섞여 주인공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을 치료할 과학기술은 남아있다. 하지만 그게 주인공을 진정으로 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의사는 음악, 음식 등 취향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수술을 진행한다. 내가 어떤 인간이 될지 선택할 수 있게 되지만 주인공은 행복해지지 못한다. 리모컨 버튼을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 내 뇌를 통제할 수 있기에,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감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가능케 하는 선택지 앞에 선 인간의 고뇌를 읽다 보면 ‘내가 이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함께 따라올 것이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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