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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징용 피해자 모독한 99엔 [횡설수설/이정은]

입력 2022-08-06 03:00업데이트 2022-08-06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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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값 99엔.’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인 정신영 할머니(92)가 이 한 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일본 돈 99엔, 한국 돈으로 931원의 입금 내역이 찍혀 있었다. 과거 일본에서 강제노동을 할 당시 받아야 했던 후생연금을 일본 측이 77년 만에 액면가 그대로 보낸 것. 할머니는 “애들 과자값도 아니고… 이걸로 일본 사람들 똥이나 닦으라고 해라”며 분개했다.

▷정 할머니는 1944년 만 14세 나이에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사로 끌려갔던 강제징용 피해자다. 배가 고파 쓰레기통에서 밥을 주워 먹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1년 넘게 노역에 시달렸지만 월급 한 푼 받지 못했다. 노역 기간에 가입했던 후생연금(근로자 연금)의 탈퇴 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자료가 불에 탔다며 확인조차 거부하던 일본 후생성은 정 할머니가 내민 연금번호를 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가입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보낸 연금탈퇴 수당이 단 99엔이었다.

▷일본의 개정 후생연금보험법에는 연금탈퇴 수당을 지급할 때 화폐가치 변동에 따른 차액을 보전해 주는 규정이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모두 적용되는 이 규정이 유독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는 예외다. 처음도 아니다. 일본은 앞서 2009년에도 양금덕 할머니 등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99엔, 2014년에는 ‘연금 가입 기간이 좀 더 길다’며 4명에게 199엔을 보냈다. 그나마 당시 환율로 1000원대를 넘었던 99엔은 이젠 정말 껌 값도 안 된다. 피해자들에 대한 모욕이자 우롱이나 다름없다.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기계적인 대응은 피해자들을 할퀸 또 다른 상처였다. 이들은 주한 일본대사관에 동전을 던지며 항의했고, 재심사 청구를 비롯한 법정 싸움에도 나섰다. 오랜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한 피해자와 시민단체들은 이제 전범기업들의 실질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강제징용 피해자 중 현재 소송을 진행 중인 이들은 유족을 포함해 1000여 명. 고령의 피해자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일본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은 최악 수준으로 떨어진 한일 관계의 핵심 뇌관이다. 정부는 해법을 찾기 위해 ‘대일 저자세 외교’ 비난을 감수하면서 일본과의 외교적 협의를 시도하고 있다. 반발하는 피해자들을 설득하느라 쩔쩔매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막상 책임을 져야 할 일본은 해결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99엔 송금’을 반복하며 공분과 반발만 부추기고 있다. 이래서야 ‘미래로 함께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어떻게 일본에 보낼 수가 있겠는가. 8·15 광복절이 다가온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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