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생명체의 진화는 ‘거듭된 표절’ 덕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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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닐 슈빈 지음·김명주 옮김/356쪽·1만8000원·부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상대적으로 큰 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진화 과정을 통해서였을까.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팀은 히말라야 원숭이와 인간의 뇌 조직을 비교했다. 그 결과 인간에게만 있는 유전자 ‘NOTCH2NL’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유전자는 거의 모든 동물이 가진 NOTCH 유전자를 복제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인간의 뇌는 ‘원본 유전자’를 베끼고 베낀 덕분에 커졌다. 그 덕에 현 인류는 조상 격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3배 가까이 큰 뇌를 갖게 됐다.

미국 시카고대 생명과학과 석좌교수인 저자는 지구 생명체의 진화가 이처럼 ‘거듭된 표절’을 거치며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인간 게놈(유전 정보)의 3분의 2 이상이 복제된 것이란다. 자연은 “가장 뻔뻔한 모방꾼”인 셈이다.

복제를 담당하는 ‘점핑 유전자’는 이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만들어내곤 한다. 일종의 실수이자 시행착오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시행착오가 진화의 또 다른 동력이 된다고 본다. 진화라는 커다란 엔진에는 변이라는 특이한 연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포유류에만 있는 탈락막 세포는 임신에 관여하는 세포다. 그런데 탈락막 세포는 점핑 유전자가 하나의 돌연변이를 일으켜 게놈 전체에 퍼뜨린 결과라고 한다. 이는 게놈 수백 군데에서 동시에 변이가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그만큼 진화를 앞당겼다.

그렇다고 오직 복제만 하는 유전자만 득세하는 건 아니다. 게놈 안에서는 복제 유전자와 이를 억제하려는 유전자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난다. 게다가 유전자 전쟁은 외부 바이러스와도 활발히 벌어진다. 인간의 뇌에서 기억과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아크 유전자’ 단백질은 에이즈 같은 바이러스 유전자와 닮은 구조를 갖고 있다. 책에 따르면 오래전 인간 유전자는 비슷한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해당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고 유전자의 일부로 바꿔버린 것이다.

“자연이 작곡자였다면 역대 최고의 저작권 위반자로 등극할 것이다.” 요즘 괜스레 다른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단 잡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막힘없는 세계적 석학의 향연에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생명체#진화#인간 게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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