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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국제

셰일가스 믿고 중동서 발뺐던 美, 고물가에 ‘석유증산’ 매달려[글로벌 포커스]

입력 2022-07-23 03:00업데이트 2022-07-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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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은 왜 중동에 쩔쩔매나
美 셰일가스 개발로 사우디와 소원… 인권 문제삼고 무기 수출도 중단
우크라 전쟁으로 국제유가 치솟자… 美물가 급등에 바이든 지지율 뚝
11월 중간선거마저 위태로워져… 바이든, 사우디 방문 ‘증산’ 호소
미국과 오랜 우방 사우디아라비아의 동맹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취임 전부터 사우디의 인권 탄압을 비판했지만 고유가 위기에 처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내 일각의 비판에도 15일(현지 시간) 사우디를 찾았다. 다급히 원유 증산을 호소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물가 급등에 따른 11월 중간선거에서의 패배 위험을 줄이고자 ‘인권 중시’라는 자신의 원칙을 스스로 깨 가며 사우디를 찾았지만 체면만 구긴 것이다.

13∼16일 4일간 이어진 그의 실익 없는 중동 순방이 끝난 지 3일 만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보란 듯 중동을 찾았다. 그는 이란, 튀르키예(터키)와 이란산 천연가스 개발 등을 포함한 3국 협력을 강조하며 빈손으로 귀국한 바이든 대통령과 대조를 보였다. 일종의 외교 실책으로 기록된 이번 순방, 여전한 물가 상승 위협 등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왜 미-러 대결의 격전지가 된 중동에서 이토록 쩔쩔매고 있을까.
○ ‘원유’와 ‘안보’의 교환
미국과 사우디는 1932년 사우디 건국 후 줄곧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 원유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한 미국과, 신생 국가로서 이란 등 주위의 적대 세력을 막기 위해 미국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필요했던 사우디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45년 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수에즈운하에 정박한 미 해군 순양함 ‘USS퀸시’ 갑판에서 사우디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선상 회담을 가졌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른 나라의 군사 위협으로부터 사우디를 보호해 주고 왕실의 권위를 인정해 줄 테니 원유 수출에 대한 대가로 미 달러만 받으라는 뜻을 밝혔다. 압둘아지즈 국왕 또한 동의했고 이후 미국산 최신 무기의 주요 수입국이 됐다. 즉, 당시 확립된 ‘원유’와 ‘안보’의 교환은 지금껏 이어져 온 양국 관계의 핵심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굳건했던 양국 관계의 균열은 21세기 들어 본격화했다. 2001년 사우디 출신의 오사마 빈라덴이 저지른 9·11테러는 미 사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사우디는 또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자 거센 불만을 표했다. 2011년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 열풍이 이슬람권을 강타했을 때 미국이 이집트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도 불만이었다.

사우디 측은 서구 기준으로 보면 권위주의 통치자일지 모르나 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특정 정권을 미국 입맛대로 몰아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건국 후 줄곧 전제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사우디 입장에서는 ‘민주화’ ‘인권’ 등을 이유로 미국이 지나치게 중동 각국에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 중동에서 발 빼는 미국
2009년 출범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셰일가스 개발에 주력하면서 양국 관계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동산 원유에 대한 미국의 필요성이 급감한 가운데 오바마 행정부는 ‘피벗 투 아시아’ 정책을 통해 중동 대신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후임자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또한 비용 절감을 이유로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 속속 철군을 단행하는 등 역시 중동에서 발을 뺐다.

특히 2015년 오바마 행정부는 수니파 맹주 사우디가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시아파 맹주 이란과 핵합의를 체결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사우디는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자국 내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했고 이란과 단교했다.

2017년 재임 내내 ‘친사우디-반이란’ 기조를 유지한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했다. 전임자의 각종 정책을 뒤엎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8년 5월 이란 핵합의 역시 전격 파기했다. 사우디는 환호했고 양국 관계가 다시 밀월로 접어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5개월 후 미 워싱턴포스트(WP) 소속 칼럼니스트였던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피살됐다. 21세기 문명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반대파 탄압에 국제 사회가 경악했고 살해 배후에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 문제를 거론하며 “집권하면 사우디에 더 이상 무기를 팔지 않겠다. 그들을 ‘왕따(pariah)’로 만들겠다”고 외쳤다. 이란 핵합의 복원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집권 후 실제 그렇게 했고 사우디에 대한 무기 수출도 중단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부통령을 지내며 ‘셰일 혁명’을 지켜본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가 없어도 얼마든지 에너지 자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겼다. 자신이 깊숙이 관여했던 이란 핵합의 또한 반드시 복원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 물가 급등에 ‘오일 파워’ 위력 고조
이랬던 바이든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치솟는 국제 유가로 미 소비자물가가 급등하면서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 수준인 30%대까지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지난해 1%대 초반에 불과했던 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6월 기준 1981년 이후 41년 내 최고치인 9.1%까지 치솟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 후 줄곧 탄소 중립 등 청정에너지 정책을 강조하며 각종 규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미 정유업계의 생산 능력도 상당히 떨어진 상태다.

바이든 대통령은 산유국 사우디가 원유 증산에 나서야만 국제 유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봤다. 그래야 자신 또한 중간선거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순방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의 외교 책사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당초 지난해 9월 사우디에서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을 논의했다. 하지만 카슈끄지 암살을 두고 설리번 보좌관이 원칙론을 강조하자 무함마드 왕세자가 고함을 질렀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올 4월에는 윌리엄 번스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관계 복원을 시도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에 대한 무기 지원을 재개했다. 이로 인해 이번 순방이 성사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순방이 발표되자 야당 공화당은 물론이고 집권 민주당에서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냉혹한 독재자와 손잡았다며 비판했다. 특히 순방 전 백악관은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 위험 때문에 순방에서 악수 등 신체 접촉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주요 지도자를 만날 때 활짝 웃으며 포옹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를 껴안지는 않았으나 그와 주먹을 맞부딪쳤다. 민주당 중진 애덤 시프 하원 정보위원장조차 “한 번의 ‘주먹 인사’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산유국 독재자들이 미국의 중동 정책을 장악하고 있다”며 대통령을 비판했다.
○ 중-러와 밀착하는 중동
국내의 비판 여론을 모를 리 없는 바이든 대통령이 그럼에도 중동을 찾은 것은 원유 증산 촉구를 넘어 중동에서 갈수록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해야 한다는 판단 또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사우디는 물론이고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등 중동 주요국의 최대 교역 파트너다. 2016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사우디, 이집트, 이란 등을 찾아 중동에서 영향력 확대를 본격화했다. 이후 양측의 협력은 경제를 넘어 첨단 기술 이전, 무기 수출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우디와 UAE는 중국산 무기의 주요 수입국이다. 미국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는 두 나라에 사이버 보안,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전수해 주려 하고 있다.

사우디가 좌지우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미 2018년 러시아를 받아들여 ‘OPEC플러스’를 출범시켰다. 중동 산유국은 서방 주요국과 달리 대러시아 제재에도 동참하지 않고 있다.

특히 중동의 양대 허브 두바이와 아부다비를 모두 보유한 UAE에는 러시아 부호들이 넘쳐난다. 고유가로 주머니가 넉넉해졌지만 서방에서 돈을 쓸 수 없는 러시아 재벌들이 비자 취득이 쉽고 재산 압류 걱정도 없는 UAE에서 고급 부동산 등을 매집하며 물 쓰듯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는 UAE가 러시아의 제재 회피 창구로 쓰이고 있다며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무함마드 왕세자와의 회동에서 중국 및 러시아 공동 견제의 필요성을 언급했다고 밝혔지만 사우디 측은 부인했다. 아딜 알 주비르 사우디 외교장관은 16일 미 CNBC에 “중국은 사우디의 대형 투자자이며 안보·정치 협력의 최고 파트너”라고 밝혔다. 미국의 압박에도 중국과 거리 두기를 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 흔들리는 바이든 리더십
바이든 대통령의 순방이 성과 없이 끝나고 중동이 미국 중국 러시아란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의 전선으로 변모하면서 이란 핵 개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등 ‘세계의 화약고’ 중동의 분쟁 해결이 더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의 3자 회담에서 시리아 내전 대책을 협의하는 등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중동에서 자신이 실력자 노릇을 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러시아가 이란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주요 과제로 내세웠던 이란 핵합의 복원 또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은 “푸틴 대통령은 이번 중동 방문을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할 기회로 여기고 있다”며 그가 이란과의 군사 협력 확대를 통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에 보복하려 한다고 진단했다.

공화당은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원유 구걸’ ‘외교 참사’로 혹평하며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반중파로 유명한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백악관은 우리의 적에게 계속 나약함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데비 레스코 하원의원은 “미국 내 넘쳐나는 석유 생산을 거부하더니 사우디 등 외국에 가서 석유를 더 생산해 달라고 구걸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비판 여론이 상당하다. 소말리아 난민 출신의 일한 오마 하원의원은 “대통령이 우리의 신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잘못된 메시지를 보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사우디가 다음 달 3일 열릴 OPEC플러스 회의에서도 원유 증산을 거부하면 민주당 내에서도 중간선거 필패론이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바이든 행정부의 가치 외교는 분명 중요하고 시도할 만한 의제였지만 엄중한 상황을 감안할 때 현실주의 외교로 선회할 때가 온 것 같다. 국제 정치는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잇따른 탈(脫)중동 정책으로 미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중동 친미 국가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산유국 러시아를 제재하기 위해서라도 중동 국가의 협력은 필수”라며 민주당 내 진보 세력이 반대해도 사우디와의 전통적인 협력 관계를 복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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