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끌려 간 도공의 후손’…15대 심수관, 424년 만에 선조 묘 참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0일 12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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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예인 15대 심수관이 경기도 김포 대곶면 청심재에서 고유제에 참석해 분향과 재배를 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9일 오전 조선 도공 심당길의 후예인 15대 심수관이 경기도 김포 대곶면 청심재에서 고유제에 참석해 분향과 재배를 하고 있다. 안철민 기자
“심수관 가문은 424년 동안 단 한 번도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칠 일을 한 적이 없음을 보고 드립니다.”

9일 낮 12시경 경기 김포시에 있는 청송 심 씨 선조들의 묘소. 424년 만에 이곳을 찾은 15대 심수관(沈壽官·63)은 선조들에게 고유제(告由祭·중대한 일을 마친 뒤 조상을 찾아 알리는 제사)를 올린 뒤 감정에 북받친 듯 눈물을 보였다.

심수관은 조선 도공의 후예다. 초대 ‘심당길’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북 남원에서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는데, 후손들이 규슈 가고시마에서 대대로 가업을 이으며 심수관요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도자기 명가로 일궜다. 12대부터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며 본명 대신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습명하고 있다.

15대 심수관은 자신의 ‘뿌리’를 찾다가 올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서 청송 심씨 일가를 만나 ‘심당길의 선조 묘가 김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날 김포를 찾았다.

지금까지 심당길의 정확한 혈통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청송 심씨 일가가 족보 등을 분석해 심당길의 아버지가 ‘심우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심당길이 일본으로 끌려간 지 424년 만이다. 심당길의 아버지인 심우인과 할아버지인 심수, 증조할아버지인 심달원의 묘는 경기 김포시 대곶면 일대에 있다.

15대 심수관은 이날 심우인의 묘를 찾아 예를 갖춰 참배한 뒤 묘소의 흙을 퍼 미리 준비한 자기에 담았다. 이 흙을 일본에 있는 심당길 묘에 뿌려 전쟁으로 흩어져 한평생 그리워했을 부자(父子)를 다시 이어주겠다는 뜻에서였다. 15대 심수관은 “초대 심당길 할아버지께서 가장 보고 싶었던 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었을까”라며 “그런 의미에서 흙을 가져가 심당길 할아버지 묘에 뿌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유제를 지내며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술을 조상들에게 올리기도 했다.

15대 심수관은 경북 청송과 전북 남원에 이어 김포라는 새로운 고향이 생겼다고 말했다. 청송은 청송 심씨의 본향이고, 남원은 심당길이 일본으로 끌려가기 전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다. 15대 심수관은 “심당길 할아버지께서는 부모님이 계시고 본인이 어렸을 때 뛰어놀았을 김포를 평생 잊지 못하셨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나의 마음엔 청송과 남원만 있었는데, 오늘 김포도 새로운 고향이 됐다”고 했다.

‘한국은 아버지의 나라,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라고 말하기도 한 15대 심수관은 한일 문화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그의 아버지 14대 심수관 역시 한일 문화교류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1989년 한국 정부로부터 가고시마 명예총영사라는 직함을 얻기도 했다.

15대 심수관은 “아버지는 나에게 ‘절대로 외로움을 느끼지 마라, 너의 뒤에는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고 말하셨다. 나 역시 지금도 심 씨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문화 교류를 더욱 확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유대감이 거기서 생기지 않겠나”라고 했다.

심수관 가문의 이야기는 일본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를 통해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날도 NHK, 산케이신문 등 일본 언론사들도 현장 취재에 나서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와 일민미술관은 1998년 심수관 가문 도자기들의 첫 국내 전시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400년 만의 귀환-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인데 당시 5만여 명이 관람하며 성황을 이뤘다.

청송 심씨 일가는 15대 심수관에게 ‘1만 개의 가지가 있어도 뿌리는 하나’라는 뜻의 ‘만지일근(萬枝一根)’이 적힌 목판 등을 선물했다.


김포=공승배 기자 ks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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