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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경제

허준이, ‘11개 추측난제’ 해결… “보통 수학자 평생 1개도 못풀어”

입력 2022-07-06 03:00업데이트 2022-07-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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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
시인 꿈꾼 고교 자퇴생 ‘수학계 노벨상’ 품었다
허준이 교수, 한국계 첫 필즈상 수상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5일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열린 필즈상 시상식에서 메달을 들어 보이고 있다. 헬싱키=AP 뉴시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39·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한국계로는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품에 안으며 한국 수학계에 새 역사를 썼다.

국제수학연맹(IMU)은 5일 오전(현지 시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필즈상 수상자로 허준이 교수와 마리나 뱌조우스카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교수, 위고 뒤미닐코팽 프랑스 고등과학원 교수, 제임스 메이나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필즈상은 탁월한 업적을 세운 만 40세 이하 젊은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수학계 최고 권위의 학술상이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에서 발표와 수여가 이뤄진다. 노벨상에 수학 분야가 없어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이날 알토대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한 허 교수는 수상자로 호명되자 동료 수학자 200여 명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거듭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허 교수는 이번 수상에 대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의미 있는 상을 받게 돼 기쁘다”며 “나의 수학적 영웅 이름 아래에 내 이름이 오르게 된다니 낯설고 무게가 많이 느껴진다”고 소감을 밝혔다.

필즈상은 수학 역사가 깊은 미국과 유럽에서 대부분 수상자가 나온다. 아시아권엔 벽이 높다. 1936년 필즈상 시상을 처음 시작한 이후 아시아 출신으로는 허 교수를 포함해 지금까지 9명의 수상자가 나왔다. 최근 30년 내엔 허 교수 외에 이란 테헤란공대 출신의 고(故) 마리암 미르자하니 교수(2014년 수상)가 유일하다. 일본은 3명, 중국은 1명을 배출했다.

허 교수는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와 어머니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가 유학하던 시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미국 국적인 허 교수는 국내에서 서울 방일초등학교와 이수중학교를 나온 뒤 상문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2007년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와 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2009년 같은 학교 수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면서 2012년 45년간 수학계 난제였던 ‘리드 추측’을 해결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6년 뒤 2018년 리드 추측을 포함하는 ‘로타 추측’마저 해결해 세계 수학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필즈상 선정위원회는 “대수기하학의 도구를 사용해 여러 조합론 문제를 풀어 ‘기하학적 조합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허준이 교수에게 필즈상을 수여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카를로스 케니그 국제수학연맹 회장은 “허 교수는 매우 다른 두 분야인 대수기하학과 조합론에서 교차점을 찾아 조합론의 난제를 해결했다”며 “이런 발견은 잘 나오지 않으며 조합론 연구로 필즈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최초”라고 말했다.

허준이 교수 ‘필즈상’ 수상 의미

‘리드추측’ ‘로타추측’ 난제 등 풀어 ‘조합 대수기하학’ 아이콘으로
“한국, 세계 수학계 리더로 떠올라 교육개편-연구 투자 등 뒷받침을”


필즈상 받는 허준이 교수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오른쪽)가 5일 오전(현지 시간)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고 있다. 헬싱키=AP 뉴시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의 연구 분야는 ‘조합 대수기하학’이다. 대수기하학은 방정식으로 풀 수 있는 기하학적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조합론은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는 것들의 수를 세는 문제를 탐구한다. 중고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경우의 수’와 비슷한,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분야다. 허 교수는 대수기하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조합론의 오랜 난제를 여러 개 해결하면서 ‘조합 대수기하학’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 보통 수학자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 해냈다
수학자들은 보통 난제를 추측의 형태로 제시한다. 허 교수는 유명한 ‘리드 추측’과 ‘로타 추측’을 비롯해 조합론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11개의 추측을 대수기하학을 이용해 해결했다. 대부분 수학자는 평생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다. 대수기하학에 대한 강력한 직관을 바탕으로 조합론의 난제를 공략했다. 두 분야 모두에 정통한 수학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연구다. 허 교수는 1차 다항식으로 직선이나 평면을 나타내고 2차 다항식으로 타원이나 쌍곡선을 분석하는 대수기하학을 접목하는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엄상일 기초과학연구원(IBS) 이산수학그룹 CI(KAIST 수리과학과 교수)는 “조합론에서 제기되는 추측 문제는 이해하기 쉽지만 풀기는 어렵다”며 “허 교수의 진짜 업적은 풀지 못한 문제를 어떤 방법을 써서 풀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수기하학이라는 아이디어를 연결해 풀어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수학 연구 생태계 재편은 숙제
올 2월 국제수학연맹(IMU)이 한국 수학의 국가 등급을 4그룹에서 최고 등급인 5그룹으로 승격시킨 데 이어 허 교수의 필즈상 수상으로 한국 수학계는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세계 수학계 리더 중 하나로 떠올랐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수학 연구 생태계 재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수학자들은 수학 연구 관련 정부출연연구소를 늘리거나 관련 투자가 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현민 부산대 수학과 교수는 5일 “국내 사립대들은 취업률이란 잣대로 수학과를 없애거나 소홀히 하고 있어 수학 생태계 자체가 위험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하승열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도 “허 교수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미국 클레이재단 지원을 받아 강의 없이 5년 동안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대 중반 박사를 배출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창옥 KAIST 수리과학과 교수는 “한국의 박사과정 시스템은 이른 나이에 박사 학위를 하고 좋은 업적을 쌓아가기 힘든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수학 교육 개편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처럼 뒤늦게 수학에 입문해 성과를 내는 ‘슬로 스타터’(시동이 늦게 걸리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양산되고 있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들을 막을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허 교수에게 축전을 보내 “이번 수상은 수학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이미 선진국에 진입했음을 각인시켜 준 쾌거”라며 “허 교수의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드린다”고 했다.




김민수 동아사이언스 기자 reborn@donga.com
헬싱키=이채린 동아사이언스 기자 rini113@donga.com
조가현 기자 gahyun@donga.com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박정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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