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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산책의 힘[이정향의 오후 3시]

이정향 영화감독
입력 2022-07-06 03:00업데이트 2022-07-06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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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미키 사토시 ‘텐텐’
이정향 영화감독
도쿄에 사는 27세의 청년 후미야. 삶의 목표 없이 대학을 8년째 다니며 1000만 원 가까운 사채 빚을 지고 있다. 친부모한테 버림받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지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은 기억이 없다. 중년의 사채업자 후쿠하라는 사흘 안에 빚을 갚지 않으면 죽일 것처럼 협박하고 사라진다. 그런데 이틀 만에 다시 나타나서는 1000만 원을 주겠단다. 단, 자신과 도쿄를 산책하는 조건으로. 장소도 기간도 후쿠하라가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빚을 갚을 재간이 없는 후미야는 석연치 않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관청이 모여 있는 지역 가스미가세키가 최종 목적지다. 실은, 그곳의 경찰청을 가려는 건데 일부러 걸어서 간다. 후쿠하라는 사랑하는 아내가 바람이 나자 이를 추궁하다가 우발적으로 죽였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자수할 생각이지만, 그 전에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도쿄의 구석구석을 거닐며 아내를 기리고 싶다. 자식이 없던 그와 아내가 즐긴 유일한 취미가 도쿄 산책이었다. 아내의 마음이 식어가는 걸 느낀 후쿠하라는 가끔 일요일 밤에 아내와 함께 막차 버스를 탔다. 일요일의 막차는 쓸쓸하기에 단둘이서 그 쓸쓸함의 가운데에 놓이면 애틋함이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하지만 아내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았다.

살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후미야는 추억이란 단어조차 싫어한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자신의 졸업앨범조차 불태웠다. 그는 부모가 데려가주질 않아서 놀이동산도 못 가봤다. 사채업자 후쿠하라를 만나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길에서 군것질도 하며, 싸구려 여관에서 나란히 잠까지 잔다. 궁상맞은 일상이지만 후미야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어떤 건지를 살짝 맛본다. 그와 함께 놀이동산에도 간다. 경찰청이 가까워지자 후미야는 그를 말리고 싶지만, 아들 같은 후미야가 며칠간의 동행으로 삶에 대한 자세가 바뀐 걸 확인한 후쿠하라는 흐뭇해하며 경찰청으로 향한다.

묘한 영화다. 뜬금없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뭔가 싶은데도 내 마음도 그들을 따라 길을 나선다. 11월 말, 쓸쓸한 계절에 도쿄의 여기저기를 떠도는 외로운 두 남자의 여정이 신기하게도 삶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확신을 준다. 단 며칠만의 경험으로 후미야는 처음으로 간직하고픈 추억이 생겼다. 오늘을 사랑하고 내일을 기대하는 청년이 되었다. 제목 텐텐(轉轉)은 ‘전전하다’라는 뜻이다. 두 남자가 대책 없이 이리저리 구르다가 맞닥뜨리는 변변치 않은 일상이지만, 살인을 저지른 후쿠하라가 후미야를 성장시키고 떠나듯, 삶은 어떤 식으로 배회하든 의미를 지닌다. 오늘 하루가 특별하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말자. 의미를 찾는 건 우리 자신의 몫이고, 그 순간 평범하게 보였던 일상이 빛을 낸다.

이정향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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