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당당해진 한국, 여유 잃은 일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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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개선 한국이 주도권 쥘 때
일본의 변화, 인내심 갖고 끌어내야

배극인 논설위원
배극인 논설위원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요구 발언은 일본에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한 해 전까지 한일 관계가 사상 최고라 할 만큼 좋았기 때문이다. 제2의 한류 붐을 타고 일본인 62%는 한국에 대해 ‘친하다’고 느꼈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한국 국민은 역대 최대의 재난 성금을 전달했다.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연이어 양국의 새 지도자로 선출되자 일본 언론은 한일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곧바로 파국으로 치달았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극한 대립을 벌이면서 대화조차 단절됐다. 미국의 중재로 박근혜 정부 말 가까스로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으나 그때뿐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징용공 문제까지 겹치면서 한일 관계는 회복 불능 상태에 접어들었다.

국교 정상화 후 한일 관계가 이처럼 오래 대화마저 단절된 시기는 없었다. 1990년대 위안부 문제와 일본 정치인의 망언,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의 날’ 조례 제정 등으로 험악했을 때도 한일 정상은 만나서 대화했다. 아베 총리마저 2006년 1차 내각 때는 한국을 방문해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모신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했다. 고이즈미 총리 때 틀어진 한일 관계를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한일 관계가 파탄 난 원인으로 양국의 전략적 가치가 변했다는 분석이 많다. 서로 아쉬울 게 적어졌다는 것이다. 경제 의존도도 줄었고, 서로를 미국이나 중국, 북한과의 관계에 따라 부차적인 관계로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한국은 중국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일본 패싱’을,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화하면서 ‘한국 패싱’을 노골화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대응이 거칠어진 기저에는 한 수 아래로 보던 나라에 역전당하고 있다는 울분도 깔려 있다. 국가경쟁력과 국제신용평가 순위, 구매력평가 기준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한국은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를 맹비난했던 예전의 일본으로선 자기모순적인 조치였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잃었다는 방증이다.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울분을 일본 평화헌법 개정과 군사대국화의 땔감으로 활용했다. 10년간 혐한몰이가 이어지면서 일본 국민들의 한국에 대한 감정은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이 방향을 틀려 해도 이제는 국내 여론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다만 달라진 국제정치 환경 때문에라도 양국 모두 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순 없게 됐다. 미국이 중국의 팽창을 본격 견제하면서 자유진영 내 경제 블록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점도 한일의 공통 안보 과제다.

한일 정상이 다시 만나고 셔틀 외교를 복원해도 일본은 다케시마의 날 행사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혐한으로 지지율을 끌어모은 우익 정치인의 망언도 이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당당해진 한국이 관계 개선의 주도권을 쥐고 나갈 여유를 가질 때다. 화내고 따지는 것만으론 상대의 생각을 못 바꾼다. 일본의 변화를 인내심을 갖고 끌어낼 필요가 있다. 일본 내 한류 열풍과 이를 동경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등장은 꽉 막힌 한일 관계에 바람구멍이 될 것이다. 무비자 입국도 상호주의에 매달릴 것 없이 우리가 먼저 푸는 여유를 보여도 좋을 것이다.


배극인 논설위원 bae2150@donga.com


#한일관계 개선#한국 주도권#일본의 변화#인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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