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앓이[이준식의 한시 한 수]〈164〉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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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마 빈말 남기고 떠난 뒤엔 뚝 끊은 발길. 달은 누각 위로 기울고 새벽 알리는

종소리만 들려오네요.

꿈속, 먼 이별에 울면서도 그댈 부르지 못했고, 다급하게 쓴 편지라 먹물이 진하지도 않네요.

촛불은 희미하게 비췻빛 휘장에 어른대고, 사향 향기 은은하게 연꽃 수 이불에 스미네요.

선녀 그리며 유신(劉晨)은 봉래산이 멀다 한탄했다지만, 우린 봉래산보다 만 겹 더 떨어져 있네요.

(來是空言去絶종, 月斜樓上五更鐘. 夢爲遠別啼難喚, 書被催成墨未濃. 蠟照半籠金翡翠, 麝薰微度繡芙蓉.

劉郞已恨蓬山遠, 更隔蓬山一萬重.) ―‘무제(無題)’ 이상은(李商隱·812∼858)

작별 후 발길 끊은 임을 향한 원망의 노래. 다시 온단 약속이 빈말임이 증명되었지만 애써 부정하고 싶을 만큼 가슴앓이가 이어진다. 그(녀)가 상대를 가슴에 품고 놓치지 못하는 사이, 새벽종이 울리고 있다. 꿈속에서 잠시 만난 듯도 한데 어느새 멀어져 간 시간들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미몽(迷夢) 속에서 반짝 떠올린 해결책은 편지. 한데 왜 먹물을 제대로 갈지도 않고 써 내려갔을까. 애틋한 그리움에 평정심을 잃은 탓일까. 아니면 편지를 전해줄 누군가가 다급하게 채근이라도 했을까. 방 안의 적막을 한결 도드라지게 하는 건 ‘비췻빛 휘장과 연꽃 수 이불’. 지난날 함께했던 이 사랑의 징표 때문에 임과의 거리는 더한층 아득하고 막막하다. 헤어진 선녀를 찾으려던 선비 유신은 선녀가 머무는 봉래산이 멀다고 한탄했다는데, 그보다 만 배나 더 아득한 우리 사이는 어쩌란 말인가.

이상은 시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와 메타포가 깔린 작품이다. 꿈속과 생시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현실과 전설 속 인물이 교차하고 급기야 시적 화자의 성별마저 모호해졌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가슴앓이#작별#원망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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