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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횡설수설/장택동]호주 첫 비영국계 총리

입력 2022-05-23 03:00업데이트 2022-05-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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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인들은 2019년 말∼2020년 초를 ‘검은 여름’이라고 부른다. 호주 전역을 휩쓴 대형 산불로 짙은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 면적의 400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불탔고, 호주인들에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산불이 급속도로 번지던 시점에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비밀리에 가족들과 함께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그는 두고두고 기후변화와 민생에 무관심한 총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21일 실시된 호주 총선을 앞두고 모리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 성향의 자유국민연합은 중국과 안보에 캠페인의 초점을 맞췄다. 모리슨 총리는 야당 노동당의 앤서니 앨버니즈 대표를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하며 색깔론을 제기했다. 한 보수단체는 트럭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걸고 다니며 ‘중국은 노동당을 원한다’고 선전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군사·경제적으로 강경한 반중 노선을 걸었던 모리슨 정부의 정책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국민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호주 ABC방송이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가장 큰 관심사로 기후변화(29%)를 꼽았고 이어 생계비 문제(13%) 등 순이었다. 국방·안보라고 답한 국민은 4%에 불과했다. 기후변화 문제는 호주인들에게 미래가 아닌 현실이었고, 치솟는 물가와 경제적 어려움이 주 관심사였다는 얘기다. 결국 온실가스 43% 감축 등을 내세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앨버니즈 대표가 새 총리로 내정됐다. 2013년 이후 8년여 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다.

▷호주 언론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다문화사회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788년 영국인들이 호주에 정착한 이후 줄곧 영국계가 호주 사회의 주류였고, 역대 30명의 총리 역시 모두 영국계였다. 하지만 호주는 이제 인구의 49%가 해외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 한 명이라도 해외 출신인 다문화사회가 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이탈리아계인 앨버니즈 대표가 121년 만에 첫 비영국계 총리에 오르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모리슨 총리가 사회 통합을 외면하고 우경화 정책을 고집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고 분석했다. 스스로 “나는 불도저 같은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모리슨 총리의 권위적 통치 스타일도 유권자들의 반감을 샀다. 반면 앨버니즈 대표는 “혁명이 아닌 개선”을 외치며 안정적 변화를 원하는 표심에 호응했다. 빈민촌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역경을 극복하며 정치인으로 성장한 그의 인간 스토리도 승리에 한몫했다. 민심을 이기는 정치는 없다는 사실을 호주 총선이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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