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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한일 영화계의 성폭력 방지 노력[이즈미 지하루 한국 블로그]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입력 2022-05-20 03:00업데이트 2022-05-2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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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4월 하순, 일본의 모 방송국에서 “한국 영화 현장에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활동하고 있냐?”는 문의가 왔다. 세계적인 히트 콘텐츠를 배출하는 한국의 상황도 참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다음 날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여성 제작자 심재명 대표님을 만났다.

2017년경 세계적으로 미투운동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 고발이 잇따르며 큰 이슈가 된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고발이 이어지지 못하고 잠잠해졌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 소노 시온(園子溫) 감독 등에 대한 피해자 고발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시 미투 문제가 화제에 오르는 가운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의 도입이 주목받게 됐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란 신체적 접촉이나 노출 등의 장면을 촬영할 때 촬영 환경이나 배우 상태를 면밀히 파악해 배우들의 성희롱 등 범죄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미투운동을 계기로 2018년 미국에서 탄생했고, 전문적인 교육으로 현재 세계에서 50∼60명이 활약 중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배우 미즈하라 기코(水原希子)가 2020년 넷플릭스 작품 ‘그녀’의 주연을 맡으며 넷플릭스 측에 코디네이터 도입을 요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는 이는 두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소개되며 인식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등 감독 6명이 ‘영화감독 유지(有志) 모임’을 만들고 성명을 발표하는 등 뒤늦게나마 일본 영화계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주로 번역이나 배우들의 일본어 지도를 통해 한국 영화에 관한 일을 시작했다. 당시 단역을 맡은 신인 여배우가 내게 현장에 와 달라고 했는데 그녀의 노출 장면이 있는 날이었다. 벌벌 떠는 모습의 딸 같은 그녀를 보면서 ‘배우도 우리 같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떠는 모습이 가엾었다. 직업이라 하더라도 스태프 앞에서 노출한다는 것에 얼마나 심적 부담이 크겠는가? 배려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국과 일본 피해자들의 고발은 공통점이 많다. 사전에 합의 없는 현장 노출 촬영은 물론이고 출연을 미끼로 한 성폭력 등. 그런 만행은 오랫동안 이어온 남성 중심 사회의 낡고 옳지 못한 사고방식에서 온 것이다.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심 대표에 의하면 한국에는 아직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없다. 하지만 성평등센터 ‘든든’의 활동이 생각 이상으로 체계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든든했다. 2016년 12월, 여성 영화인 모임이 이 사업을 구상해 2017년 영화인의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 실태를 조사했고, 2018년 3월에 센터 ‘든든’이 개소했다. 현재까지 전문상담사를 통해 수시로 상담과 신고가 이뤄져 지난해에는 44건의 신고와 상담을 받았다. 또 전문 강사를 양성해 예방교육을 실시한다. 종로에 소재한 센터에 가보니 여성들로 구성된 직원들이 바쁘게 일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한국의 장점은 영화인이 뭉쳐서 영화계 변화의 원동력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 영화계가 부러워하는 부분이다. 센터장은 앞으로 한국에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도입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아마 머지않아 생길 것이다.

글을 준비하며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2016년) 현장이 생각났다. 주인공들의 목욕 장면 촬영 현장은 주변에서 보이지 않도록 파란 시트로 가려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당시 PD님에게 전화해 물었더니 현장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배려가 이뤄져 있었다. 노출 장면이 있을 때는 미리 콘티를 통해 배우와 사전 확인과 약속을 했고, 충분한 리허설을 거쳤다. 또 촬영에 최소한의 스태프가 들어가는 것은 기본이며, 베드신에는 가능하면 여성 스태프만 들어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크레인에 카메라를 부착해 진행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노출 장면이 있는 박 감독 작품에는 이러한 섬세한 배려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이미 ‘박쥐’(2009년) 현장에서도 있었다고 하니, 감독마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 영화계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미투운동 이후 한국과 일본의 영화 현장은 빠르고 크게 변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야만인’ 소리를 듣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정신 차려야 할 것이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서경대 글로벌비즈니스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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