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푸틴 비판’ 여성 록그룹 푸시 라이엇 리더 러시아 탈출기

  • 뉴시스
  • 입력 2022년 5월 11일 1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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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러시아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때 무명의 여성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Pussy Riot)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근처 러시아정교회 구세주성당 제단에서 “펑크 기도문”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이들은 1분만에 성당에서 쫓겨났지만 공연 동영상이 유튜브에 오르면서 세계적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그룹 리더 마리아 알료히나(33)는 “난동”혐의로 2년형을 받고 복역한 뒤에도 푸틴의 압제에 계속 항거했으며 지난 여름 이래 6차례나 날조된 혐의가 적용돼 보름씩 구금되기도 했다.

지난 4월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 비판을 강력히 처벌하고 나서면서 가택연금 상태였던 알료히나는 21일 동안 구치소에 구금됐다. 결국 알료히나는 일시적으로라도 러시아를 떠나기로 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현재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 체류중인 알료히나를 인터뷰해 그가 극적으로 탈출한 과정을 전했다.

모스크바 경찰이 알료히나가 머무는 친구의 아파트를 감시했지만 그는 음식 배달원 차림으로 변장해 아파트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휴대전화는 경찰을 속이기 위해 아파트에 두고 왔다. 친구의 차를 타고 벨라루스 국경으로 갔고 다시 리투아니아로 빠져나왔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서 인터뷰에 응한 알료히나는 “탈출에 성공해 기쁘다.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지만 러시아 정부에 한 방 먹였다”고 했다. 온통 검은 옷차림의 알료히나는 무지개색 허리가방을 찬 모습이었다. “지금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알료히나는 성인이 된 뒤로 러시아가 헌법을 존중하고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인권을 존중하도록 투쟁해왔다. 2013년 12월 가석방 된 뒤 푸시 라이엇의 동료와 함께 러시아의 범죄 및 처벌을 다루는 매체 미디어존(Mediazona)를 발행했다.

“라이엇의 나날들”이라는 회고록도 썼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공연도 했다. 러시아 전국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3곳에서만 공연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탄압을 받았다.

당국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러시아에 남으려 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하는 동안 내내 손톱을 물어뜯었고 전자담배와 말로로 담배를 계속 피워댔다. 그는 창이 두꺼운 신발을 신고 탈출했다. 감옥에 있을 때 찢은 수건으로 끈을 맨 신발이었다. 그는 오는 12일 베를린에서 시작하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모금 공연여행 내내 저항의 뜻으로 이 신발을 신을 예정이다.

푸시 라이엇이 10년전 처음 일을 벌였을 때는 정치적 주목을 노린 행동으로 여겨졌다. 러시아 정교회와 크렘린 사이의 공생관계를 조롱하는 “펑크 기도문”을 불렀을 때 비난이 있었지만 지금 보면 선견지명이 있는 행동이었다.

교회 수장인 키릴 대주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찬양했고 유럽연합(EU)은 그를 제재 대상 명단에 올렸으며 10년 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만들었다”고 선언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침공을 예고했다.

알료히나는 감방에서 푸틴의 연설을 들었다. 침공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러시아 전체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더 이상 존재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러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가치 아래 통합됐고, 어떻게 변할 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푸시 라이엇 그룹은 구성원이 12명으로 늘어났다. 대부분 러시아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다. 알료히나의 여자 친구 슈테인은 한 달 전 러시아를 탈출했다. 알료히나처럼 배달원 복장으로 위장해 빠져나왔다. 알료히나와 함께 살던 아파트 문에 누군가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하는 문구가 붙었다.
알료히나와 슈테인은 인스타그램에 러시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글을 올려 함께 투옥됐었다. 지난 2월 알료히나는 2015년에 인스타그램에 푸틴의 지지자인 벨라루스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를 비판한 글 때문에 “나치 상징을 선전한” 혐의로 다시 15일간 구금됐다. 슈타인도 함께였다.

알료히나는 “정부가 우리를 어쩌지 못해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알료히나는 벨라루스에서 리투아니아 국경에 도달했을 때 러시아 신분증을 제시하고 입국을 시도했다. 여권을 당국에 압수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러시아에서 수배된 시점이었다.

첫 국경 통과 시도는 실패했다. 국경 경비원에게 6시간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두번째 시도에서도 의심을 받아 쫓겨났지만 세번째 만에 성공했다. 이번엔 해외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아이슬란드 행위예술가 라그나르 카르탄슨이 한 유럽국에 말해 알료히나가 EU 회원국 시민이라는 증명서를 받아준 것이다. 증명서를 내준 국가는 공개되길 거부했다. 몰래 벨라루스로 서류를 들여와 알료히나에게 전달했다. 알료히나는 벨라루스에 머무는 동안 호텔 등 신분증을 제출해야 하는 곳을 피했다.

이 증명서 덕분에 리투아니아행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경비원이 자신을 러시아인이 아니라 “유럽인”으로 대하는 것을 보고 우스웠다고 했다. “지난주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마치 스파이 소설 같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러시아에서 벨라루스를 거쳐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러시아의 사법 기관이 엉성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밖에서 보면 정말 무서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정말 엉망”이라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른다”고 했다. 알료히나는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만 활동가들이 투옥되거나 망명하는 지금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푸시 라이엇 그룹의 다른 멤버들이 속속 빌니우스로 오고 있다. 이들은 유럽 투어를 준비중이다. 며칠 뒤면 아이슬랜드로 가 그들이 전 대법원 건물에서 공연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카르탄슨을 만난다.

알료히나는 카르탄슨과 그의 가족 뵤르크에게 함께 공연하자고 제안했고 카르탄슨은 기꺼이 함께 하기로 했다.

알료히나의 휴대전화에선 “안전”하게 탈출해서 기쁘다는 메시지가 계속 울렸다. 알료히나가 메시지들을 살펴보며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평했다.

“정신이 자유로우면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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