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독재자의 아들’ 복귀 눈앞…36년간 변화 없는 필리핀 정치

  • 뉴스1
  • 입력 2022년 5월 9일 16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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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후보의 어머니인 이멜다가 1986년 하와이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소유하던 신발 컬렉션이 세간에 드러났다. © 뉴스1
마르코스 후보의 어머니인 이멜다가 1986년 하와이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소유하던 신발 컬렉션이 세간에 드러났다. © 뉴스1
‘피플 파워’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이 36년만에 말라카냥궁(필리핀 대통령 관저) 복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쫓아낸 독재자 가문이 다시 정계 복귀를 한다는 사실은 혁명이 추구했던 민주화 가치들이 이후, 제도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36년간 실추된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려던 아들의 노력은 그가 대통령이 되는 순간 회수된 재산 100억 달러(약 12조7000억원)를 되찾고 가문에 걸려있던 부패혐의 무마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로이터통신은 9일(현지시간) 지적했다. 즉 독재로의 회귀 우려가 커진 것이다.

필리핀 전역에서 이날 치러지고 있는 대선에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인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의 승리는 사실상 유력해지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 기관인 ‘펄스 아시아’가 지난 2일 발표한 필리핀 대선 여론조사에서 마르코스 주니오 후보는 56%의 지지로 1위를 차지한 반면 로브레도는 지지율이 전달(24%)에서 23%로 1%p 떨어졌다.

로브레도에 대한 최근 지지 상승이 이번 여론 조사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반전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2배가 넘게 차이나는 현 상황을 뒤집는 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가문 정치’…쫓겨난 독재자 아들, 36년만 권력 되찾을 수 있는 이유

국민에게 쫓겨난 독재자의 아들이 어떻게 36년만에 아버지를 포함한 가문의 실추된 이미지 복권할 수 있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필리핀 특유의 ‘가문 정치’를 AFP 통신이 집중 조명했다.

필리핀 내 엘리트 집안들은 오랫동안 가난에 찌든 이 나라를 지배해 왔으며 여러 세대에 걸쳐 특혜를 나눠주거나 표를 사고 폭력에 의존하면서 권력의 자리를 고수해 왔다고 AFP는 전했다.

가문 정치로 유명한 필리핀에서 마르코스 주니어의 승리 전망은 단순히 정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쫓겨난 가문이 행한 수십 년간 노력의 결과물이자 의도적인 집단 기억 왜곡의 결과물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분석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되는데 유권자의 대다수가 18세에서 40세 사이라는 사실도 도움이 됐지만, 이러한 결과는 경제와 정치 권력이 여전히 소수에게 집중된 필리핀 정치의 민낯을 드러낸다고 WP는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내기 위해 1986년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후에도 필리핀 내 가문 정치는 더욱 공고해졌다고 분석했다.

마닐라에 위치한 드라살 대학 훌리오 티안키 교수는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319개 가문이 필리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데 각 가문의 지위가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힘을 잃은 가문도 언제든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정치 시스템이 필리핀 정치 사회에 고착화되어 있다”며 마르코스 전 대통령 가문을 언급했다.

마르코스 가문은 국민들에게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한 마르코스 대통령이 1989년 사망하고 난 뒤 정치적 기반의 거점인 일로코스 노테로 돌아와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발판 삼아 다시금 고위직에 가족 구성원들을 당선 시켰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3년만인 19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이후로 많은 마르코스 가문들이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4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잃었던 권력을 조금씩 되찾아 온 마르코스 가문은 이번 대선에서 마르코스 주니어가 대통령직에 앉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마르코스 가문 36년간 처벌 안받아…봉봉, 당선 후 회수된 재산 되찾기 나설듯

마르코스 주니어가 당선될 경우 ‘피플 파워’ 혁명 이후 독재 청산을 하지 못한 필리핀 정치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로이터통신은 지적했다. 혁명 이후 마르코스 가문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회수된 재산마저 마르코스 주니어가 되찾으려 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쫓겨난 뒤에도 마르코스 가문은 부패 혐의에 대한 사법적 처벌에서 사실상 비켜나 있었다. 이멜다의 경우, 일부 부패 혐의가 인정됐지만 고령 등의 이유로 형집행은 미뤄졌다.

마르코스 일가는 자신들에게 걸려있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 중이며 재산 관련 재판만 최소 40건 이상 진행중이다. 이멜다 역시 2018년 선고 받은 7건의 부패 혐의에 대해 항소하고 있다.

아울러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당선되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21년간 집권하면서 부정축재한 재산 100억달러를 회수를 위해 힘을 쏟아오던 기관들의 힘도 한순간 잃게될 전망이다.

필리핀 대통령이 마르코스 가문의 비리를 조사하는 바른정부위원회(PCGG)에 대한 인사권을 쥐고 있고 필리핀의 반부패기구인 옴부즈맨, 세무서장을 임명, 직접적 관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1986년에 설립된 PCGG가 마르코스 일가의 재산 50억 달러(6조3000억원)를 회수했다면서 그러나 또 다른 24억 달러는 여전히 소송에 휘말려 있으며 미납된 세금 39억 달러(약 5조원)도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지난 1월 인터뷰에서 가문의 재산에 대해 묻는 질문에 “더 이상 이 사건에 가족이 관여하지 않는다. 법원이 명령하는 대로 따를 것”이라며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을 많지 않다.

PCGG의 전 위원인 루벤 카란자는 마르코스의 대선 승리는 자산 회수를 위한 36년간의 싸움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면서 “마르코스는 당선 후 PCGG를 이용해 어떠한 부정 재산이든 붙들려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한편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1986년 ‘피플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 필리핀을 21년간 철권통치한 인물이다.

집권 초기엔 경제발전과 정부개혁, 부정부패 척결 등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일련의 개혁들을 추진했고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높은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하는 등 초반에는 성공가도만을 달렸다.

그러나 경제 사정 악화와 개혁 실패 등에 부딪히자 독재 정치를 하기 시작했고 이에 실망한 필리핀 국민들은 반정부, 반마르코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그는 계엄령을 선포해 반정부 인사들과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부인 등 일가친척들을 주요직책에 앉히며 부패를 일삼았다.

마르코스는 결국 1986년 2월 정권연장을 시도하다 시민들의 저항에 부닥쳐 권좌에서 내려왔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직후 하와이에 안치된 마르코스의 시신을 반환받아 마닐라에 있는 영웅 묘지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뒤집기 위해 노력해왔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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