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놀 권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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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우민이(가명)는 부모가 모두 의사인데 교육열이 남다르다. 두 돌이 지나면서 영어학원 스포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저녁엔 가정교사가 동화책 읽어주고 영어 비디오를 보여줬다. 퇴근한 부모는 아들이 그날 공부한 내용을 점검한 후 잠자리에 들게 했다. 주말이나 방학 땐 리조트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그때도 수영이나 점토 교사에게 무언가를 배우며 지냈다. 우민이는 어떻게 컸을까.

▷우민이는 학원 친구들과 싸우거나 교사에게 혼나는 일이 잦아졌고, 초등학생이 된 후로는 못 말리는 문제아가 됐다. 검사 결과 우민이는 지능은 높은데 정서와 사회성 발달은 더딘 것으로 나왔다. 교육부가 ‘놀이, 아이 성장의 무한 공간’이라는 연구서에서 ‘놀 권리’를 잃고 불행해진 아이의 대표 사례로 소개한 내용이다. 정부는 내년 아동의 놀 권리를 명시한 아동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뇌와 신체를 발달시키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규칙을 만들고 지키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한국에서 ‘놀 권리’는 ‘공부할 의무’에 밀려난 지 오래다. 초등학생의 일평균 학습 시간은 6시간 49분, 여가 시간은 49분이다(2018년 아동종합실태조사). 동아일보가 한국과 미국의 평범한 초6 학생의 방과 후 일과를 비교한 적이 있다. 한국 학생은 오후 3시 수업이 끝나면 5시까지 공부방-저녁 먹고 영어학원-주 3회 2시간씩 수학 과외-밤 12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표다. 반면 미국 학생은 오후 3시 반 하교-체육활동-밴드활동-저녁식사 후 1시간 숙제-2시간 놀기-밤 10시 취침이다.

▷놀이의 질은 더 심각하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보고 게임하고 채팅한다. 운동 시간이 늘면 자아존중감과 생활만족도가 높아지지만 미디어 이용 시간이 길면 우울감과 공격성만 강해진다. 놀이의 양과 질 모두 부실한 한국 어린이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다. 5∼14세 우울증 환자도 2020년 9621명으로 3년 새 49.8%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 우울증 환자 증가폭은 23.2%다.

▷아동의 놀 권리란 어떻게 놀지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놀이의 기회는 균등하며, 놀이의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놀이 시간과 내용을 강요하지 않고, 정부는 취약계층 아이에게도 놀 기회를 보장하며, 피아노는 수행평가 때문에, 농구는 키 크라고 시키는 등 놀이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다. 아이에겐 ‘놀이가 밥’이라고 했다. 커서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하려고 “그만 놀고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건 아이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밥을 뺏는 것만큼 무지하고 잔인한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등학생#아이#놀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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