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도 가족도 그에게 춤추지 말라했다… ‘남성 무용수’로 살아온 67년의 기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4일 11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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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도 가족도 그에게 춤추지 말라 했다. 누이 넷을 둔 집의 외아들이었다. 부모는 귀한 막내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다. 9살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한 끼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월륜(月輪) 조흥동 씨(81·사진)는 다른 꿈을 꿨다. 유성기에서 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오면 누이의 치마저고리를 두르고 자신도 모르는 새 춤을 췄다. ‘춤추는 남자’라며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한량무 태평무 등을 추는 스승 17명에게 한국 전통 남성 춤을 사사받았다. 비평가들은 살풀이 무당춤부터 불교 무용까지 한국 전통 남성 춤을 섭렵한 그를 ‘백과사전’이라 부른다.

“언젠가 자서전을 내도 될 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어요. 부모님 사진을 한 쪽에 싣고 이 말을 하고 꼭 싶었거든요. 판·검사나 부자는 못 되었지만 부모님 사진 빛나게 해줄 정도로 최고의 무용가가 됐다고….”

최근 ‘월륜 조흥동 자서전’(댄스포럼)을 펴내며 어릴 적 꿈을 이룬 조 씨를 3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동에 있는 월륜 조흥동 춤 전수관에서 만났다. 14세 무렵부터 현재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국악사 양성소에서 무용을 배운 지 67년. 그는 “부모한테도 춤을 배운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을 정도로 사회적인 시선이 열악했다”며 “거리에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니다가도 무용 연습실에만 들어서면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춤이 내 팔자였다”며 웃었다.

“남성 무용수들은 가슴 한쪽에 죄의식을 안고 살았어요.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춤을 춘 죄. 나는 떳떳해지고 싶었어요.”

조 씨는 춤추는 남성에 대한 세상의 차별과 맞섰다. 1981년 한국 최초로 한국남성무용단을 창단했다. 조 씨는 “위대한 남성 무용가들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우리가 다같이 모여서 춤추는 남성에 대한 차별에 맞서보자고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자부했다. 한국남성무용단은 창단 직후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에 출전했다. 출연자는 모두 남성. 여성 무용이 주류였던 무용계에서 파격적인 시도였지만 변화가 일어났다. 이 대회에서 한국남성무용단이 안무상을 받은 것. 이를 두고 국내 1세대 무용 평론가 고 조동화 선생은 당시 “무용계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평했다. 남성 무용수들이 무대 전면에서 조명을 받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1962년 국립무용단원으로 입단해 1990년 국립무용단 상임 안무가, 1993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을 역임한 그는 아직까지도 제자들에게 직접 몸을 쓰며 춤사위를 가르친다. 혹여 몸이 녹슬까 주말이면 새벽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신당동의 무용연습실에 나와 조명 하나를 켜두고 몸을 움직인다.

“올해 81세지만 내일 당장 무대에 올라가 춤추래도 90분 공연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있어요. 여생 동안 제자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춤사위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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