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삶 앞에는 ‘톨레랑스’도 없다 [특파원칼럼/김윤종]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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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지지 40% 넘은 佛 대선
민생이 국가 리더의 제1 덕목

김윤종 파리 특파원
김윤종 파리 특파원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의 나라 프랑스에 ‘극우’가 왜 이렇게 득세하게 됐나?’

지난달 24일 프랑스 대선 결선투표에서 중도 성향의 마크롱 대통령은 58.5%를 득표해 41.5%를 얻은 극우 마린 르펜 국민연합 후보에 승리했다. 프랑스는 물론 전 세계 언론들은 마크롱의 재선보다, 오히려 극우 대선 후보가 프랑스 사상 최초로 지지율 40%를 돌파한 이유를 집중 조명했다.

기자 또한 ‘자유 평등 박애’로 대표되는 시민혁명을 이룬 프랑스, 2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으로 인종차별, 배타주의를 혐오했던 프랑스인들이 반(反)이민, 반유럽연합(EU)을 내건 극우 후보를 절반 가까이 선호한 ‘보다 본질적인’ 원인이 궁금했다.

르펜 지지율이 가장 높은 파리 13구부터 찾아갔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은 질문을 해도 정치적 성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은 반면 청년들은 거침없이 “르펜이나 마크롱 둘 다 싫다”며 “생활이 힘들다 보니 민생 공약이 많은 르펜이 나아 보였다”고 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첫해인 2020년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8.3%나 떨어졌다. 2차 대전 이후 최대 감소 폭이다. 지난해에는 2만7285개 기업이 파산했고, 빈곤층이 100만여 명 증가했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5.4%로 유로화를 도입한 2002년 이후 최고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외교에 몰두한 마크롱과 달리 르펜이 팍팍해진 민생을 공략하고 나선 배경이다. 그는 파스타, 휴지 등 생필품 가격 인하를 비롯해 휘발유, 가스, 전기 등 에너지 부가가치세 인하, 저소득층·30대 이하 세금 감면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결선투표를 분석해보니 노동자, 구직자, 월 순소득 1250유로(약 167만 원) 미만 가구에서는 르펜이 56∼65%의 득표를 얻어 마크롱을 제쳤다. 이민 2, 3세대 중 상당수도 오히려 르펜을 지지했을 정도. 프랑스 전체 빈곤율이 8∼10% 초반인 반면 이민자 빈곤율은 20%를 넘는 탓이다. 이민자 실업률도 13∼17%로, 전체 평균(7% 내외)의 2배나 된다.

물론 르펜이 이민자에 대한 적대심리를 악용해 확고한 지지층을 구축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는 르펜만의 점유물이 아니다. 마크롱 또한 임기 중 무슬림 활동에 대한 정부 감독을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아프리카 국가 비자 발급을 대폭 축소했다.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은 르펜에게 “당신의 이민 정책은 너무 약하다”고 핀잔을 줬을 정도다.

“르펜의 친서민 공약은 극우를 감추기 위한 사탕발림”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40%가 넘는 득표율은 분명 그의 민생 정책에서 비롯됐다. 현지 언론들도 “반이민 공약이 더 이상 르펜 지지자들의 최고 관심사가 아니다”라며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르펜의 말이 통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가올 6월 총선에선 극우정당이 더 약진하고, 차기 대선 혹은 차차기 대선에서 극우 대통령이 나올 수 있다는 예측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극우, 반이민 여부보다는 팍팍해진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양극화를 줄이는 효율적인 민생 정책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이 차기 대통령에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먹고사는 문제를 등한시하고 이념에 몰두하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프랑스인의 관용이 사라지고 있다.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닐 것이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
#톨레랑스#프랑스#극우 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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