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내내 그려진 화가의 기억 속 한 장면[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30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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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는
잊고 싶지 않은

성북동 자택에서 윤중식 작가, 2012년 4월,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성북동 자택에서 윤중식 작가, 2012년 4월,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태언 기자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제 노을을 보셨나요? 저는 평소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대를 좋아하는데요. 오늘 소개할 화가 윤중식(1913~2012) 덕에 요즘 저도 노을 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곤 합니다.

지난달, 윤중식 화백의 유족은 성북구립미술관에 고인의 작품과 자료 500점을 무상 기증했습니다. 윤중식은 박수근 이중섭 등과 가깝게 지냈고, 살아생전 함께 단체전을 열었을 정도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이 낯선 분들이 훨씬 많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선 ‘석양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기억해두시면 됩니다.

그는 생애 내내 석양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레퍼토리를 고수하는 것은 드문 예인데요. 대체 윤중식에게 석양은 무엇이었던 걸까요?

답하기에 앞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석양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각자의 답을 안고 윤중식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 그날 그 순간을

윤중식

1. 윤중식은 반세기 내내 석양 풍경을 그린다. 이는 실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어릴 적 보았던 기억 속 고향의 석양을 떠올리며 그린 것이었다.

2. 그의 고향은 평양이다. 윤중식은 월남 도중 아내, 두 딸과 영영 헤어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가족과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석양을 그리는 동력이었다. 반복적으로 석양을 그리며 그는 인생의 무게를 거둬들여 나갔다.

3. 그는 자신의 그림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시장에 잘 내놓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생전 대중의 주목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죽는 날까지 석양을 그리다 간 ‘석양의 화가’라는 공고한 타이틀을 갖게 된다.


○눈앞에서 맞닥뜨린 가족과의 생이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윤중식의 삶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집니다. 1951년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던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는데요.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장남 윤대경 씨(75)와의 대화를 잠깐 살펴봅시다.
기자 : 월남 도중 가족이 이산했다고 들었습니다.

윤대경 : 피난길에 갑자기 폭격이 가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께서는 젖먹이 둘째 여동생을 업고, 한 손으로는 제 손을 잡은 채 달리기 시작하셨죠. 어머니는 첫째 누나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피신했고요. 그 후로 영영 두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셋이서 내려가다 둘째 여동생도 죽었어요. 젖먹이었거든요. 1·4 후퇴 피난길은 겨울길이었고, 우리는 먹을 게 없었죠.

기자 : 두 분이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요?

윤대경 : 부산이 첫 피난지였습니다. 이후에 대구를 거쳐서 1953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이중섭 선생이 먼저 자리 잡고 계셨어요. 우리보다는 형편이 나아서 이중섭 선생이 “걱정 말고 우리 집에 가자”며 챙겨주셨어요.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이중섭 선생이 항구 바닥에 만취해 계셔서 저희는 결국 이모 집으로 가 지냈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이 아내를 만나러 일본으로의 밀항을 요구하면서 술을 걸치셨다고 하더이다. 하하.

이런 사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윤중식의 작품은 모두 그가 남하한 후의 작품뿐입니다. 작품을 들고 전쟁길을 걸을 순 없었을 테니 말이죠. 대신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피난길의 순간을 그린 드로잉을 볼 수 있습니다. 윤중식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낡은 종이와 수채물감을 구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드로잉 시리즈 28점에는 총을 쏘는 인민군, 울부짖는 피난민들, 정신없이 죽을 먹는 아들의 모습 등이 담겨있습니다.

윤중식, 전쟁 드로잉, 23x26.5㎝
윤중식, 전쟁 드로잉, 23x26.5㎝



제가 가장 오래도록 봤던 드로잉은 1번 작품이었습니다. 불타는 고향을 등지고 온 가족이 남으로 떠나는 모습입니다. 5명이 함께 했던 마지막 장면을, 가족과 헤어지고 난 뒤 그렸을 윤중식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윤중식은 추후 서울 시내 보육원을 헤집고 다녔다고 합니다. ‘헤어진 첫째 딸을 찾을 수 있진 않을까’하는 마음에 발톱이 다 빠지도록 말이죠.
○반세기 내내 그린 석양
그는 1953년 서울로 온 지 1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엽니다. 이때 이경성 비평가로부터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는데요. 그로부터 내내 윤중식의 개인전에서는 석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윤중식, 무제, 26.6×35.8cm, 종이에 유채, 1983
윤중식, 무제, 26.6×35.8cm, 종이에 유채, 1983


그런데 이 석양은 그가 직접 어딘가에 사생을 나가 본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릴 적 고향에서 봤던 노을 진 풍경을 마음속으로 떠올린 것이죠. 실제 윤중식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석양을 그렸다고 합니다.

즉 그에게 석양은 곧 향수였습니다. 도로 갈 수 없는 고향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죠. 이번 전시의 제목 ‘회향’의 한자가 ‘回向’(돌아올 회·향할 향)가 아니라 ‘懷鄕’(품을 회·시골 향)인 이유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삶이 가장 온전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몇 번이고 마음의 눈으로 그때를 되새김질했습니다.

윤중식, 석양, 116.7x90.9cm, 캔버스에 유채, 2004
윤중식, 석양, 116.7x90.9cm, 캔버스에 유채, 2004



“붉은 태양이 서쪽 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석양은 찬란한 빛과 신비의 세계로 물들고 다양한 변화에 가슴마저 울렁거리게 된다. 너무나 순간적인 빛과 색을 바라보는 찰나 강한 빛과 색은 사라지고 안식과 침묵에 고요한 적막으로 변해버린다.” -윤중식의 에세이 ‘석양’


그의 작품이 따뜻한 색감을 갖고 있지만 아련함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이유겠지요. 하루를 비추던 해가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 찬란한 주홍빛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잠깐. 그리고 가족과 행복했던 시절도 윤중식에게는 너무나 짧게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짧았던 이 순간을 그는 가장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북동에서 사랑하는 빠렛트와 함께
석양은 그가 남기고 간 아틀리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장에는 그의 아틀리에를 재현해놓은 공간이 있습니다. 미술관은 그가 1963년부터 살았던 성북동 아틀리에의 물품들을 그대로 옮겨왔는데, 그의 팔레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빠렛트/2011년 8, 2일/현재 98세/“사용 중”


윤중식이 쓰던 팔레트
윤중식이 쓰던 팔레트


그 팔레트를 사용해 마지막까지 그린 작품도 의자 앞에 놓인 석양 그림입니다. 작고하기 약 10년 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탓에 색감도 형태도 뭉개져 있습니다.

윤중식 아틀리에 재현 공간
윤중식 아틀리에 재현 공간


윤중식은 별세 전날까지 이 앞에 서서 그림을 그렸고, 일어나 아침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김경민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와의 대화를 통해 윤중식이 남기고 간 삶의 흔적을 살펴봅시다.

기자 : 윤중식 화백의 아틀리에 공개는 처음 아닌가요?

학예사 : 윤중식 선생님은 가족들조차도 작업실에 잘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러니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도 처음이 맞습니다. 작업실에 놓인 물건들을 보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사랑하셨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값이 비싼 캔버스 천을 구하기 힘들 때에는 도자기와 조개 위에도 그림을 그리셨어요.

기자 : 일상품이 캔버스셨네요.

학예사 : 그렇죠. 실제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 약 15점만 캔버스에 그려졌고 나머지는 하드보드지, 종이(캔트지), 박스지 등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작업실 한편에 놓아뒀던 항아리를 그린 출품작 ‘무제’도 케이크 받침대에 그린 그림입니다. 전시에 출품되진 않았지만 목가구의 문짝이나 과일포장 스티로폼, 심지어는 양파링 과자 포장지에도 그린 그림들이 있었죠.

기자 : 재현 공간 입구에 놓인 그림 ‘무제’ 속 모델은 누구인가요?

학예사 : 부인입니다. 윤중식 선생님은 서울에 정착하신 뒤 새로 가정을 일구셨어요. 전쟁통에 두 딸을 잃었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두 딸을 다시 얻게 되죠. 이 초상은 재혼한 부인의 얼굴인데요. 윤중식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기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부인께서는 교통사고로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윤중식 선생님은 거의 눈이 보이지 않으셨지만 그림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기자 : 풍경화만 그리신 건 아니신가봅니다.


학예사 : 풍경이 윤중식 선생님 작품의 주를 이루는 건 맞지만, 실내 정물과 인물화도 즐겨 그리셨어요.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셔서 주로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보니 그런듯합니다. 인물화의 모델도 대개가 손녀, 부모님, 부인 등 가족입니다.

기자 : 작업량이 적지 않은데 왜 대중에 덜 알려졌던 걸까요?

학예사 : 미술시장에 유통된 작품이 적기 때문이에요.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판매하는 걸 꺼리셨어요. 작품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으셨거든요. 대신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작업실에 손수 모아놓으셨습니다. 물론 상경 후 초반에는 몇몇 작품을 파시긴 했는데 그때마다 정말 안타까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어도 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하셨고요. 팔레트 글귀에서 볼 수 있듯 선생님께서는 정말 그림 그리기 자체를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윤중식, 무제, 45.3×33.2㎝, 2012
윤중식, 무제, 45.3×33.2㎝, 2012



이곳 아틀리에는 여전히 성북구에 존재합니다. “평양이란 고향을 떠나왔는데, 다신 갈 수 없으니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야 했다”던 장남 윤대경 씨의 말처럼 성북동은 윤중식에게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윤중식이 50년 넘게 성북동에 살았던 이유도 언덕 위의 석양과 산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그는 끊임없이 석양을 그리면서 때론 추억에 잠겨 미소 짓고, 또 때론 그리움에 서글펐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인생의 하중을 받아들여나갔을 겁니다. “그의 그림에 불안과 회한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지 않은 것은 풍랑 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커다란 도량과 경륜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서성록 평론가의 말처럼요.

여러분께서는 이 화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기억 속에 오래 자리하고 있는 장면이요. 평생을 바쳐 곱씹어도 좋을, 언제든 다시 재회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지금 눈을 감고 찬찬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전시 정보

윤중식10주기 추모전 《회향懷鄕》

2022.03.20~2022.07.03

성북구립미술관(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성북로 134)

작품수 14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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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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