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앞세워 운명 개척하는 국가들[오늘과 내일/김용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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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저물며 국가·기업 역할 재설정
생각을 바꿔 새로운 민관 협업모델 만들어야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한국의 대표적인 신성장 산업인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은 리튬, 니켈 등 희소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상대국 기업들의 도발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러내고 있다. 이 분야의 한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는 “해외 광산을 일찌감치 사들여 확보한 경우에도 언제 그 나라 정부가 자원 국유화에 나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국가의 이해관계가 기업 계약에 우선하는 것. 세계화 시대 신뢰 기반이 무너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계화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국가와 기업의 관계가 재설정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국가의 외교·안보 전략에서 기업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위협 아래 놓인 대만에서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 TSMC에 대한 투자는 기업 전략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안보 전략이다. 대만의 ‘안전핀’이 된 TSMC는 미국과 중국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미국과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에서 공격적인 반도체 공장 신설에 나서고 있다.

미국에서도 조 바이든 대통령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한 반도체 산업 재부흥을 선언하자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로 화답했고, 애플 퀄컴 엔비디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이 줄줄이 지지를 밝혔다. 인텔은 나아가 반도체 안보 위기를 우려하는 유럽에 110조 원 투자 카드를 꺼내 들며 동맹 강화에도 나섰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기업이 사회 문제를 푸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늘려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소득불평등 불만이 폭발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리쇼어링(해외 진출한 제조기업의 국내 복귀)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트럼프 행정부도 중국 견제 등 정치적인 이유로 이를 이어 받았다. 바이든 정부 또한 공급망 복원력을 키우기 위한 리쇼어링을 가속화했다. 리쇼어링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리쇼어링 효과로 지난해에만 미국에서 22만 개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다.

‘소비 천국’인 미국이 제조업 강국으로 체질을 전환한 것이다. 전기차, 제약, 의료기기, 전자제품 등 제조업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양극화 문제를 야기했던 기업들이 ‘최고의 사회안전망’이라는 일자리 창출로 문제 해결 전면에 서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낮은 법인세와 유연한 규제로 기업이 주도하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지원했다.

기후변화 등 환경 문제에서도 기업을 통한 해법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자국 내 생산된 배터리와 전기차 등 친환경 산업에 보조금 폭탄을 경쟁적으로 쏟아붓고 있다. 일론 머스크와 빌 게이츠 등 세계 부호들은 친환경 기술에서 새로운 금맥을 찾으려 앞다퉈 솔루션을 내놓고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의 대항마로 북미 지역 캐나다엔 새로운 전기차 배터리 밸류 체인이 전략적으로 형성되고 있다.

공익을 추구하는 정부가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거리를 두고 견제해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이 같은 변화를 따라잡기 어렵다. 기업을 매개로 국가 경쟁력을 발휘하는 글로벌 각축전에서 우리가 가진 강점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국가 정책 구상 단계부터 기업을 참여시키고, 기업들이 제대로 뛸 수 있는 여건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생각을 바꿔 새로운 민관 협력 모델을 만드는 것이 새 정부의 중요한 숙제라는 얘기다.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오늘과 내일#김용석#국가#기업#민관 협업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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