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과 ‘검수완박’[오늘과 내일/정연욱]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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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지지층에만 기댄 ‘검수완박’에 역풍
민주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자기부정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시간을 18년 전으로 돌려 보자.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집권 여당으로 다수당이 됐으니 거칠 게 없었다. 탄핵 역풍으로 배지를 단 ‘탄돌이’ 초선 108명은 기세등등했다.

“두 번 다시 초선 군기 잡겠다고 하면 그 사람을 물어뜯어 버리겠다.”

한 초선 의원의 농담 섞인 발언이었지만 강경파 초선들의 정서를 대변했다. 온건 중도 성향의 중진들과 각을 세웠던 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밀어붙였다.

여야 물밑 협상이 시작되자 야당 지도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 독소조항 개정에 동의했다. 여야가 모처럼 개정안 접점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초선들은 국보법 완전 폐지를 고수했다. 초선들은 지도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중진들은 초선들의 주장이 노무현 청와대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침묵했다. 결국 여야 합의안은 당내에서 휴지조각이 됐고, 역풍이 불었다. 국보법은 폐지는커녕 한 자구도 손대지 못했다. 강경 지지층만 쳐다보고 ‘닥치고 국보법 폐지’만 외친 결과였다. 2년 전 총선 압승 직후 이해찬이 “열린우리당을 반면교사해야 한다”고 일갈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검수완박’ 드라이브에 나선 민주당은 열린우리당의 데자뷔다. 강경 지지층을 대변하는 ‘처럼회’ 소속 초선들이 전면에 나섰다. 온건 중도 성향 의원들은 그 기세에 눌려 몸을 사렸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굳이 강경 지지층과 맞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12일 의원총회는 비공개였는데도 검수완박에 비판적인 의원들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문자폭탄이 쏟아졌다고 한다. 만장일치로 당론 채택이 됐다고 했지만 찬반 표결조차 없었다. 당론에 반대했던 금태섭의 낙천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의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목적을 위해선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발상이다. 안건조정위를 무력화하기 위한 민형배의 기획 탈당을 ‘비상한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유독 정당의 정체성, 가치를 강조해온 민주당으로선 낯 뜨거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하면 개혁, 혁명이라는 당위가 됐다. 문재인 정권에서 추진한 웬만한 정책마다 ‘개혁’이란 딱지가 남발된 이유일 것이다. 개혁에 저항하거나 반발하면 반개혁 세력, 청산 대상이 된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자신들은 신격화하는 구도다. 주류 86 운동권 그룹이 과거 독재정권과 맞섰던 ‘민주 대 독재’ 프레임이다. 선악(善惡) 대결 구도가 선명한데 꼼꼼하게 법리를 검토하자는 주장은 하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향자는 “검수완박을 안 하면 문재인 청와대 20명이 감옥 간다며 찬성하라더라”고 말했다.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 출범 전에 검수완박 입법을 마무리하려 한 속내가 드러났다. 비정상 검찰의 정상화란 검찰개혁의 명분은 퇴색됐다. 당내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민주당의 검수완박 드라이브는 좌초했다. 처음에 공언한 대로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빼앗지는 못했어도 검찰의 선거범죄 등 4대 범죄 수사권은 폐지하는 ‘절반의 성과’라고 자평한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보여준 반민주적 행태는 두고두고 그림자로 남을 것이다.

18년 전 열린우리당과 지금의 민주당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여야 협상보다 다수(多數)라는 힘에만 기댔다. 수많은 경고에 귀를 닫은 채 밀어붙였다. 강경 지지층에 휘둘리면 민심은 멀어지기 마련이다. 너무나 명징한 교훈이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것 같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국가보안법#검수완박#민주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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