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인플레 공포, 구조 개혁 논의 미룰 때 아니다[동아광장/이지홍]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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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3월 물가상승률 4.1%, 상승세 가팔라
임금·재정 억제하고 원가절감 방안 찾아야
80년대 구조조정으로 위기극복 英 배울 때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1970년 영국의 집권 노동당이 퇴장을 한다. 제조업은 쇠락하고 규제와 복지는 늘어나며 국가 재정이 악화되는 가운데, 에드워드 히스가 이끄는 보수당은 영국 경제의 대대적인 ‘구조 개혁’을 앞세우며 6년 만의 정권 교체에 성공한다. 그러나 추락하는 국가경쟁력이 단기간에 되살아나긴 어렵다. 지속된 높은 실업률을 견디지 못한 히스 총리는 전격적인 정책 ‘유턴’을 결단한다. 노동당이 쓰던 대규모 확대 재정 정책을 펼친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1973년 중동전쟁발 ‘1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히스 정부는 인플레이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나랏빚으로 돌려 막던 실업률마저 다시 치솟고, 이듬해 보수당은 정권을 뺏긴다.

2022년 온 세계가 인플레 공포에 휩싸였다.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물가상승률이 미국에선 8.5%, 영국에선 7%를 기록했다. 50년 전 수준이다. 이번 인플레는 여러 면에서 70년대를 연상케 한다. 호황이라 ‘수요’가 올라가면서 물가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닌 ‘공급’ 측면의 인플레가 출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여러 지정학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글로벌 공급망에 균열이 생기고 원유, 곡물을 비롯한 필수 원자재 가격이 급상승했다. 원가가 오르다 보니 여기저기서 줄줄이 가격을 따라 올리고 있다.

한국의 3월 인플레는 4.1%로 영미와 비교해 다소 낮은 수치지만 그 상승세가 매우 가파르고 대외 의존도가 원체 높아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도 지적되고 있다. 경직된 노동시장과 기업을 옥죄는 온갖 규제, 대기업과 제조업에 치우친 산업 불균형, 그리고 민주당 정권에서 1000조 원까지 불어난 국가 부채와 비대해진 공공 부문까지, 1차 오일쇼크 때 영국과 상당히 닮았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대(對)러시아 경제 제재가 장기화되면 원자재 가격이 더 뛸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과 거점 지역의 봉쇄가 이어지면 글로벌 공급망의 병목 현상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게다가 인플레를 부추기는 내부 복병까지 도사리고 있다. 물가가 오르면서 낮아지는 생활수준 때문에 발생하는 임금 상승과 추가 재정 지출 압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플레의 본질은 에너지와 주요 소재·부품들이 임금 등 다른 생산 비용보다 ‘상대적’으로 비싸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임금과 정부 지원을 아무리 늘린다고 바뀌지 않는 구조적 변화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 상승과 재정 확대는 돈의 가치만 떨어뜨릴 뿐이다. 금리 인상 같은 거시·금융 정책은 인플레 진정에 도움이 되지만 경기 둔화란 부작용을 수반하기 때문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따라서 적절한 거시·금융 정책과 함께 임금과 재정 확대 압력을 최대한 억제하고, 원가 상승분을 상쇄할 비용 절감을 다른 데서 찾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다.

50년 전 히스 총리는 집권 내내 강성 노조에 시달렸다. 이들의 요구들을 받아주는 바람에 물가 상승, 임금 상승 그리고 추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인플레 소용돌이(inflation spiral)’를 막지 못했다. 고삐 풀린 국가 부채는 화폐 가치 추락에 기름을 부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이긴 하나 한국의 정치 지형을 고려할 때 안심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최근 시작된 내년 최저임금 심의에선 지역·업종별 차등 적용을 두고 벌써부터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고, 버스노조의 총파업도 예고돼 있다. 지금 대승적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앞으로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관성이 붙어버린 재정 포퓰리즘도 큰 문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수십조 원짜리 추경이 출격 준비 중이다. 올해 이미 두 번째다. 기업의 비용 부담을 덜려면 핵심 규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 역시 현실적으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많은 난관을 무사히 넘으려면 결국 한국 경제의 근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엔간한 정치력으론 실천이 불가능해서 그 중요도를 잘 알면서도 미루고 미룬 오랜 숙제다. 그러나 구조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을 것 같다. 1차 오일쇼크 대응에 실패한 영국은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70년대 내내 극심한 불황을 겪는다. 인플레는 계속 올라 무려 30%에 육박하고, 재정 악화와 파운드화 폭락이 이어지며 끝내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다. 영국이 이 치욕적인 환란을 극복하고 유럽 본토의 경쟁국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80년대 들어와서야 정신 차리고 단행한 각고의 구조조정 노력이었다.

이지홍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인플레 공포#구조 개혁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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