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스타일’ 옆의 복도 천장엔 특이한 구조물이 매달려 있다. 길이가 22m쯤 되는 거대한 뱀이다. 거대한 뱀 한 마리. ‘구명조끼 뱀’(2019년). 왜 거기에 있을까. S자 형태로 꿈틀거리고 있는 뱀, 마치 승천이라도 하려는 듯이 기운이 생동하고 있다. 그런데 뱀의 몸은 특이한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 바로 밝은 색깔의 구명조끼이다. 레스보스섬 해변에서 수습한 조끼들, 무려 140개로 만든 거대한 뱀 한 마리. 레스보스섬은 중동지역의 난민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기착한 곳이다. 난민촌이 있는 해변에서 아이웨이웨이는 버려진 50만 개의 조끼에 눈길을 뒀다. 바다를 건너온 난민들이 버리고 간 구명조끼. 조끼는 뱀의 비늘이 되었다. 왜 하필이면 뱀일까. 뱀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난다.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기도 하다. 용은 물에서 살면서 하늘을 꿈꾼다. 승천하는 뱀, 비룡(飛龍)은 새로운 탄생이기도 하다. 아이웨이웨이는 난민이 버리고 간 조끼로 뱀을 만들고, 난민의 새로운 삶을 기도했다. 하지만 뱀은 날개나 다리가 없어 과연 새로운 세계로 날아갈 수 있을까. 이미 작가는 쓰촨 대지진 당시 아이들의 가방을 모아 뱀을 만든 경험도 있다.

서울관의 전시 제목은 ‘인간미래’였다. 인간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염원이 담긴 것 같다. 하기야 웨이웨이(未未)의 미(未)는 ‘아직 그러하지 않다’라는 의미, 미완의 뜻을 지니고 있다. 도달하지 못한 것. 그것은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고, 억압에의 저항을 몸으로 실천했다. 서울관 전시장 벽면을 차지한 ‘세계인권 선언’은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 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제1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출신 민족 또는 사회적 신분, 재산의 많고 적음, 출생 또는 그 밖의 지위에 따른 그 어떤 구분도 없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제2조).”
서울에서 오래간만에 선이 굵은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대륙 기질이라 할까. 어쩌면 그렇게 스케일이 클까. 물론 그 스케일은 작품의 크기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웨이웨이는 다양한 재료와 표현 형식을 통해 미술이라는 장르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묵직한 주제를 개성적으로 표현해 늘 감동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그의 사상은 귀 기울여 듣게 한다.
“우리 인간은 지구상의 한 종으로서 능력이 과대해졌습니다. 인간의 상상할 수 없는 발달은 우리가 스스로의 지식과 능력이 다른 모든 종을 능가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인류의 탐욕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많은 종의 멸종이 초래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생명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나무도 풀도 잎사귀도 우리의 생명도, 말을 하지 않거나 특별히 표현하지 않아도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바람과 비를 공유하고 새를 불러들이며, 또한 관대하고 다른 종들과 조화롭습니다. 인류만이 조화롭지 못하며, 때문에 저는 다른 종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얕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뭇조각을 가구나 건축 자재 또는 땔감으로 여기듯, 그것들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할 뿐 그것이 우리 및 다른 존재들과 가지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는 근래 난민을 주제로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난민의 옷과 신발을 수습해 설치한 ‘빨래방’(2016년)이나 영화 ‘유랑하는 사람들’(2017년), ‘남겨진 사람들’(2019년) 등은 작가의 ‘현실 참여’를 읽게 한다. 난민, 그나저나 난민은 왜 계속 생기고 있을까. 타의에 의해 조국의 보금자리를 떠나 낯선 외지에서 떠돌아야 하는 사람들. 난민이라는 단어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늘 여기의 우리는 과연 난민은 아닐까. 난민, 그는 누구인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