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소설 써도 악몽 안 꿔”…부커상 최종 후보 ‘저주토끼’ 작가 정보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10일 13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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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단편소설집 ‘저주토끼’(Cursed Bunny·아작)의 표제작 ‘저주토끼’는 끔찍한 소설이다. 집안 대대로 저주용품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모형 저주토끼를 만든다. 억울하게 몰락한 친구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다. 저주토끼는 원수의 손자 뇌를 갉아먹는다. 친구의 원수 집안은 삼대(三代)가 처참하게 몰락한다. 소설이 더 무서운 건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모두 덤덤하기 때문이다. 복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도, 이를 듣는 손자도 끔찍한 이야기에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작가도 소설처럼 무서운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달랐다. 8일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만난 작가 정보라(46)는 시종일관 웃으며 친절히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그는 “코미디언이 자기 농담에 먼저 웃으면 관객들이 안 웃는다”며 “공포 소설도 작가가 먼저 호들갑을 떨면 김이 새지 않냐”고 했다. 공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건조하게 썼다는 것이다. “통념을 뒤집어야 독특한 이야기가 생겨요. 토끼는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최대한 무섭게 만들어 보기로 했죠.”

정 작가의 부모는 둘 다 치과의사였다. 유년시절 살던 집은 부모가 운영하는 치과와 연결돼 있었다. 치과에도, 집에도 부모님이 연구용으로 갖다놓은 두개골 모형이 있었다. 사람의 몸을 그린 인체 구조도가 집 벽에 붙어 있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정 작가는 인체를 공포 소설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단편소설 ‘머리’에서 변기에서 머리가 튀어나오는데 등장인물들은 놀라지도 않는 식이다. 정 작가는 “어릴 적엔 친구들 집도 두개골 모형과 인체 구조도를 하나씩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커서 보니 독특한 경험이었다”며 “공포 소설을 쓴 날에도 악몽을 안 꾼다”고 했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정 작가에게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마술적 사실주의란 실제와 환상이 뒤섞인 예술 장르다. 남자친구도 없는 미혼 여성이 임신하고(단편소설 ‘몸하다’), 아무도 없는 암흑에서 목소리가 들리는(단편소설 ‘차가운 손가락’) 일이 소설에서 능청스럽게 벌어지는 이유다. 미국 예일대에서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 인디애나대에서 슬라브 문학 박사를 취득한 것이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정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 게 러시아 문학의 특성”이라며 “도스토옙스키(1821~1881), 고골(1809~1852) 등 러시아 대문호도 꿈과 현실을 섞어 쓰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창조한다”고 했다.

한국에선 비주류에 속하는 공포, 공상과학(SF) 장르인 ‘저주토끼’를 발굴한 건 번역가 허정범(41·안톤 허)이다. 허 번역가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애초부터 변두리에 있는 이야기를 번역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저주토끼’에 끌렸다”고 했다. 문단의 공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데다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정 작가를 소개하는 게 부담되지 않았냐고 묻자 허 번역가는 “한강 작가가 2016년 ‘채식주의자’로 이 상을 받기 전 대중에게 인기 있었냐”고 대차게 되물었다.

허 변역가가 가장 공을 들인 건 문체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When we make our cursed fetishes, it’s important that they’re pretty)처럼 유머와 공포가 뒤섞인 정 작가의 문장이 서양 독자들의 마음을 끌 것이라 생각했다. 허 번역가는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 등 영미권 작가들은 상반된 정서가 담긴 문장을 많이 쓴다”며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탓에 이미 서양적인 정 작가의 아이러니한 문장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고 했다.

최종 수상이 가능할까 묻자 허 번역가는 망설이다 답했다.

“대중가요나 드라마에 비해선 한국 문학이 영미권에서 인정받는 상황은 아니에요. 수상 가능성은 낮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받는다면 진짜 엄청난 일이 될 겁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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