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이들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7일 11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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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나직이 벨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다음주에 짝을 바꿔요. 그때 꼭 1번이 되게 해주세요.”

“엄마, 엄마 딸 여자친구 있어.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날 며칠 전, 전시장에 놓인 공중전화부스에 비밀을 털어놓고 간 또 다른 관람객이다. 수화기를 매개로 관객은 이름 모를 이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듣는다.



설은아 작가(47·사진)가 기획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 이야기다. 설 작가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석파정 서울미술관, 소다미술관 등에서 여덟 차례 해당 전시를 해왔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만 10만 여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는 등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3년간 모인 통화만 9만7934통. 설 작가는 이 목소리들 중 가장 애정 하는 450개의 통화 내용을 모아 지난달 25일 동명의 책(수오서재)을 발간했다.

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만난 설 작가는 관련 전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억누르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는 것”이라며 “내 안에 드는 모든 마음에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세상 누군가는 선입견 없이 듣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실험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가 발화자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책은 청취자를 위한 물건이다. 설 작가는 “힘들 때 위로가 되는 건 ‘괜찮아 힘내’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이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며 “(관객이)수많은 이야기 중에 자신과 공명(共鳴)하는 이야기들을 선물처럼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작가는 전시 기간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도록 ARS 번호를 열어놓고 있다. 아직도 하루에 적게는 30통, 많게는 7000통까지 음성 메시지가 온다. 물론 다수의 전화는 내내 침묵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침묵도 하나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역할은 지구 반대편 세상의 끝인 듯한 공간에 그 목소리들을 놓아주는 것까지다. 그는 2018년 첫 전시를 마치고 2019년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마을 우수아이아에 가 관객들의 음성 메시지를 틀어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모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설 작가는 2019년부터 모인 목소리들을 놓아주러 지난 5일에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으로 떠났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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