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바늘 하나로 더듬어가는… 고향 같은 음악에 대해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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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356쪽·2만5000원·문학동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택에서 LP 음반을 듣고 있는 모습. 그는 “멍하니 앉아서 레코드 표지를 차례차례 손으로 들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동아일보DB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택에서 LP 음반을 듣고 있는 모습. 그는 “멍하니 앉아서 레코드 표지를 차례차례 손으로 들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동아일보DB
무라카미 하루키 선생께.

이번엔 LP 레코드 책을 내셨군요. 한국 독서시장의 반응도 뜨겁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취향이 이미 브랜드’라는 선생의 클래식 사랑에 처음부터 호감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제 청춘의 시절, 선생의 단편들에 탐닉했고 많은 문장들을 핥아먹듯이 읽었습니다만 클래식 음악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뭐랄까, 음악이 상황에 흡수되기보다는 ‘뭔가 있는 듯이 보이기 위한’ 장식물처럼 생각되었었죠.

그러다 선생이 명지휘자와 나눈 대담을 정리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를 읽었고, 제 선입견과 달리 내공이 깊으신 음악 팬이시란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쓸데없이 서설이 길었습니다.

선생께서 프롤로그 ‘왜 아날로그 레코드인가’에 적으신 것처럼 레코드는 물성(物性)에 충실한 물건입니다. 만드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정성을 들인 만큼 티가 나죠. 커버 디자인이나, 알판을 빼들었을 때 육안으로 느껴지는 상태에서 그 판이 들려주는 소리를 웬만큼 예상할 수 있고, 또 그 예상은 웬만큼 맞곤 했습니다. ‘LP판은 애정을 가지고 대하면 그만한 반응을 보여 준다’는 선생의 얘기는 마니아라면 공감할 겁니다. ‘레코드의 보은(報恩)’이라고 표현하셨죠.

선생의 감상 레퍼토리가 방대하다는 사실은 소개하신 작품 제목들에서도 알 만했습니다. 처음엔 아연했습니다. ‘왜 스트라빈스키 중에서도 불새나 봄의 제전이 아니라 페트루슈카야?’ ‘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 3번을 빼놓고 4번이야?’라는 식이었죠. 그러다 선생의 ‘선입견 없는 음악 듣기’를 느꼈습니다. 필수 레퍼토리 목록을 정해 놓고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히 손에 걸린 음반을 듣다가 마음에 들면 다른 연주를 사 모으고 했던, 긴 시간과 애정이 들어간 과정이었을 겁니다.


오늘날 LP 레코드를 듣는다는 건 대개의 경우 연주 자체부터 빈티지 또는 구래식(舊來式)이라는 걸 뜻합니다. 피아니스트 하스킬, 바이올리니스트 그뤼미오, 지휘자 스토고프스키 등의 이름을 읽는 것은 제게도 아련한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선생의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소련이 무슨 우주선을 쏘아올린 해’ ‘무슨 팀이 고시엔 야구에서 우승한 해’ 같은 표현을 상기시키는 아련함입니다.

저도 평소 ‘듣는 귀가 스무 개면 들리는 감흥도 열 개’라고 주장해 온 만큼 각 연주에 대한 느낌이 똑같았을 수는 없습니다만, 무릎을 치며 공감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클렘페러는 정정당당한 인상의 브람스다. 그러나 따스함이라면…’ ‘브레인의 호른 연주가 퍼스널하다면 터크웰은 정조(正調)라고 할 만하다’ 등은 그 일부라고 하겠습니다. ‘볼트는 과연 ‘경(Sir)’ 칭호를 가진 지휘자답다. 한낮의 햇살이 흘러드는 살롱에서 홍차라도 마시면서 느긋하게 듣고 싶은 걸’ 같은 무라카미표 표현들에도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덧붙여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추억담들, ‘박하우스의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2번 구 녹음 모노럴반은 중고가게에서 무려 50엔에 샀다. 가격표를 볼 때마다 죄송해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하하….

선생의 ‘덕후’ 취미를 응원합니다. ‘왜 이 작가가 손을 대야만 눈길이 쏠려?’라는 시기 섞인 반응도 나오겠지만, 과거의 거장들이 남긴 위대한 정신의 유산들이 조명을 받을 수 있다면 무조건 환영입니다. 나아가 더욱 다채로운 취향들이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매혹시키는 세상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무라카미 하루키#홍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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