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하러 찾아와 침묵하는 사람들[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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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늘 약속 시간에 맞춰 오고 분석용 소파에 눕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하던 피분석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입을 닫고 침묵에 빠지면 분석은 멈춥니다. 오랫동안 분석가를 칭송하며 긍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던 사람이 갑자기 분석가를 업신여기면서 해석을 부정하고 반박한다면, 돌변한 태도에 대처하고, 의미를 탐색하며, 해법을 찾는 일은 어렵습니다.

분석가도 사람이어서 침묵하는 피분석자에게 좌절감을, 공격하는 피분석자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낍니다. 상황을 침착하게 포용하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석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해가 되면 쉬운 말로 자세히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부끄러워서 감추려고 말을 아낀다”는 식으로. 또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두려워서 이를 막으려고 반박하고 비난한다”는 식으로.

피분석자의 침묵이 분석가가 휴가를 다녀온 직후에 나타났다면 자신을 멀리한 채로 좋은 시간을 보낸 분석가에 대한 분노와 연관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어려서 자신을 방치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미움이 자신을 비슷하게 대한 분석가에게 옮겨와서 침묵이라는 저항으로 표현됐다고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피분석자가 보이는 저항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가장 뚜렷하게는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거나 늦습니다. 그렇게 반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분석가를 궁금하게, 걱정하게 합니다. 결석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느끼면 일단 와서 말을 하지 않는, 침묵으로 저항합니다. 같은 시공간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겁니다. 대화를 매개로 이뤄지는 분석에서 말이 사라지면 작업은 정지됩니다. 늘 대화에 익숙한 분석가는 침묵이 쌓이면 말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는 내내 불편한 감정과 긴장감을 느낍니다.

피분석자는 살면서 어려움을 겪고, 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러면 분석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협조해야 하지 않나요?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고 싶은 동시에 불안, 두려움, 수치감, 죄책감 등의 이유로 감춥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너무 오래가면, 분석가는 “말을 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겁니다. 그래도 침묵하면 “속에 깊이 있는 이야기일수록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라고 합니다.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수십 시간에 걸쳐 전혀 말이 없었던 경우도 경험했습니다. 그분은 빠지지 않고 오면서 계속 침묵했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묘합니다.

말을 이어가는 저항도 있습니다. 말의 홍수 속에서 분석이 방해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백화점 입구의 화장품 판매장부터 고층부 식당까지 한 바퀴 둘러본 이야기만 하면서 시간을 채운다면 침묵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수동적인 방법이지만 속마음을 제대로 감춘 겁니다. 능동적인 방법은 분석가가 하는 말, 해석에 일일이 토를 달며 반박하는 겁니다.

스스로 만든 저항의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가둔 피분석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분석에서 흔히 부닥치는 중요 과제입니다. 저항은 어린 시절 싹틉니다. 세월이 흘러 분석 현장에서 표현되는 저항은 어린 시절에 피분석자가 경험한 바에서, 특히 엄마와 맺었던 관계에서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저항을 분석하면 피분석자의 마음이 느끼는 부담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서 통제를 잃어버릴 것 같은, 정체성이 상실될 것 같은 두려움이 일례이고 그 뿌리는 어린 시절 경험에 있습니다. 속마음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은 마치 남 앞에서 옷을 벗는 것처럼 늘 부끄럽습니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게 저항합니다. 저항은 무의식적 소망, 수반되는 감정, 현실의 어려움이 뒤섞여 돌아가는 소용돌이입니다. 지난 세월 나름대로 안전하게 밀폐해 감췄던, 까맣게 잊고 지냈던 마음속 쓰라린 파편을 드러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시간 중에 잠드는 피분석자도 있습니다. 금지된 소망이 무의식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으려고 일어난 저항일 수 있습니다. 지난밤 잠을 설쳐 일어난 현상으로 단순하게 믿어도 될까요?

누구나 자신에게 일이 생길 것을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소중한 사람이나 가치를 잃어버리거나, 벌을 받거나, 자신이 소외될 위험이 있다면 큰일입니다. 피분석자는 분석가와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시간, 비용, 에너지를 투자한 분석이기에 빠져들고 싶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니 늘 멀어지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분석가에게 기댈 것인가, 아닌가, 다가갈 것인가, 거리를 둘 것인가, 드러낼 것인가, 숨길 것인가, 이렇게 저항은 분석의 시공간에서 되풀이됩니다.

손뼉을 한 손으로 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두 손이어야 합니다. 피분석자가 저항하면 분석가는 고민에 빠집니다. 곤경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분석은 수련으로 축적된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반복되는 탐색과 해석으로 피분석자 자신이 자신의 내면세계가 자신에게, 분석가에게,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깨달으면 저항은 해소되고 삶이 긍정적으로 변화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상담#침묵#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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