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용석]생각의 크기가 혁신성장의 인프라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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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조정과 혁신 수용 어려운 한국
유연한 생각과 상상이 미래 좌우할 것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인도는 경제 규모에 비해 유통산업 발달이 더딘 나라다. 전국 연결 도로, 철도망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대형 유통업을 꿈꾸는 기업가가 등장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시장에선 새로운 시도가 나오지 않았고 재래식 유통업자들의 시장 장악이 이어져 왔다.

사회·경제 기반을 의미하는 인프라(infrastructure)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범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연결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기업가가 상상할 수 있는 아이디어 범위는 아마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나아가 상상의 범위 자체가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달라진다.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이 없었다면 신지애, 박인비, 고진영 선수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물리적 인프라뿐 아니라 사회 저변의 생각과 상상의 크기가 성장의 기반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혁신성장을 이끄는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포지티브 규제를 비판한다. 포지티브 규제는 정부가 법규 등을 통해 ‘A와 B만 할 수 있다’고 정해 놓는 것을 말한다. 허락한 것 외에는 하면 안 되므로 상상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신 ‘A와 B는 하면 안 된다’고 정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금지 항목을 뺀 나머지는 다 해도 되므로 상상의 크기가 커진다. 창의적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명쾌한 원리인데도 실행이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혁신의 본질적 속성 탓이다. 혁신은 ‘공정’과 함께하기 어렵다. 새로운 가치 창출을 추구하는 혁신은 기존 가치에 묶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시장은 승자 독식을 부추긴다. 하지만 혁신을 통해 전체 파이를 키워가야 한다는 의지, 동력이 꺼지면 결국 갈라파고스 처지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혁신의 승자가 지속가능성을 추구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혁신을 지지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선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비스업보다는 제조업, 내수시장보단 수출시장에서의 혁신, 다시 말해 갈등이 적은 혁신이 항상 좋은 대접을 받았다. 서비스업 혁신이 대체로 기존 가치를 이전하면서 효율성을 키우는 쪽이라면 제조업 혁신은 전에 없던 가치를 새로 만드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라 안 기존 이해관계자와 부대끼는 내수산업보다 나라 밖 시장을 개척하는 수출산업이 환영받았다. 그래서 어떤 기업들은 수출기업 이미지로 포장하는 ‘수출 워싱(washing)’에 나서기도 한다.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이사회에서 물러나 글로벌 사업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힌 데에도 이런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년 전 이사회에서 물러나 글로벌투자책임자(GIO) 직책만 맡아온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

두 창업자 행보의 공통분모가 글로벌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성공한다면 현재 네이버, 카카오 기업 가치의 한계를 돌파할 것이다. 하지만 혁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강한 반작용이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일이다. 규제 개혁을 매일 외치지만 변하지 않는 속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갈등을 조정하고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생각과 상상의 힘이야말로 혁신성장이 필요한 지금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인프라가 아닐까.


김용석 산업1부장 yong@donga.com


#혁신성장#유연한 생각#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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