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당한 미소년 빼앗긴 인생이여 구슬픈 가락이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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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34〉인간 존엄에 대해

영화 ‘파리넬리’에서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로서 무대에서 노래하지만 어린 시절 거세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마운틴픽쳐스 제공
영화 ‘파리넬리’에서 파리넬리는 카스트라토로서 무대에서 노래하지만 어린 시절 거세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마운틴픽쳐스 제공
조선시대 중인 신분의 김진수(1797∼1865)는 1832년 사행단을 따라 청나라를 다녀와 시집 ‘연경잡영(燕京雜詠)’을 남겼다. 북경에서 시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조선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환희(幻戱·마술 공연)였다.


시는 공연의 한 대목을 스케치하듯 포착한다.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듯하지만, 시인은 주석을 달아 이면의 진실을 드러낸다. 곱게 단장한 공연자는 여장을 한 ‘우동(優童·미소년 배우)’이었다.

명청 시대 귀족들 사이엔 남색(男色)이 유행했고 그중 북경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우춘춘, ‘明淸社會性愛風氣’) 어린아이를 사서 여장을 시킨 뒤 첩으로 삼기도 했다. 소년들은 성적 노리개로 착취된 뒤 버려져 마술을 배워 연명하기도 했다. 시처럼 무대에서 공연을 하거나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기생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채 공연에 이용된다는 점에선 서양 고전음악계의 카스트라토를 연상시킨다. 제라르 코르비오 감독의 영화 ‘파리넬리’(1994년)는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거세된 소년들의 비극을 그렸다. 주인공인 유명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역시 평생 거세의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시인은 우동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주석을 달아 그들의 가련한 처지를 자세히 설명했고, 다른 연작시에서도 이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했다. ‘북학의’를 쓴 박제가가 먼저 이를 언급한 적이 있지만(‘燕京雜絶’ 제91수), 시인처럼 주목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경거리로 전락한 ‘우동’의 처지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엘리펀트 맨’(1980년)과도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19세기 영국 실존 인물인 존 메릭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사람들이 기형을 가진 주인공을 ‘코끼리 인간’이란 구경거리로 삼아 착취하고 괴롭힌다. 메릭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한 사람은 외과의사 트리브스와 배우 켄들 부인뿐이었다. 트리브스가 메릭을 구경거리로 삼은 사람들에게 분노한 것처럼, 김진수의 시에 평을 단 황종현도 우동을 사고파는 사람들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너희는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냐며 안타까워했다.

영화의 원작이 된 애슐리 몬터규의 책 ‘엘리펀트 맨’은 ‘인간 존엄에 대한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진수의 시에서도 구경거리가 된 소년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한 짙은 동정심이 배어난다. 그 많던 우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인생유전에 한숨짓게 된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파리넬리#인간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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