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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찾고 싶은 동네 만드는 젊은 소상공인들의 힘[광화문에서/박선희]

입력 2022-01-29 03:00업데이트 2022-01-2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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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산업2부 차장
‘서핑 성지’로 뜬 강원 양양군 현남면을 찾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회관 앞에 태닝한 구릿빛 몸을 가진 서퍼들이 비치타월을 걸치고 걸어 다니던 장면이었다. 이장님 안내 말씀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의 어촌마을을 미러 선글라스를 쓴 채 여유롭게 활보하는 힙스터라니. 그곳을 역동적이고 활기찬 곳으로 만든 건 돈을 쏟아부어 다시 지은 대형 건물이나 새로 깐 도로 같은 게 아니었다. 주인공은 그 힙스터들, 그러니까 콘텐츠였다.

요즘 서울에서 새롭게 뜬다는 동네들이 대체로 이런 느낌이다. 내부순환도로가 지나는 제기동 정릉 천변가에는 창문 필름이 벗겨진 기사식당과 자물쇠로 잠긴 슬레이트 창고 옆에 작고 힙한 와인바가 생겨나고 있다. 의류 도매시장으로 번성했다가 지금은 쇠락한 중구 신당동 일대, 변변한 상권이 형성돼 있지 않았던 용산구 한강로동 일대에도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며 골목길 분위기를 조금씩 바꾼다.

괜찮은 감각의 가게 한둘 들어온다고 동네 풍경이 극적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낡은 다세대주택 위로 전깃줄이 엉켜 있고, 폐업한 도매점이나 철물점은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이런 길 위에 불쑥 생겨난 미국식 브런치 카페나 소규모 편집숍, 독립서점은 낙후된 서울 뒷골목 풍경을 이색적으로 치환시키는 힘이 있다. 그 이질성이 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콘텐츠의 힘이다.

콘텐츠를 갖춘 젊은 소상공인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제기동, 신길동, 홍은동 같은 이름 없던 상권에 둥지를 튼 것은 높은 임대료와 권리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불가피한 여건에서 출발했지만 제약은 도약의 출발이 됐다. 유동인구가 적고 목이 나쁘니 전문성이나 독특한 개성, 마니아를 저격하는 콘텐츠로 확실히 무장해 타깃 고객을 끌어와야 했고, 인스타그램 같은 온라인 홍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게 통했다.

본보와 한국신용데이터의 분석 결과 지난해 이런 변두리 동네 젊은 사장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서울 매출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성과를 낸 것으로 나타났다. 비대면 시대 가속화된 대형 상권의 몰락과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의 취향 변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소득 수준이 높아진 현대 소비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매스 브랜드보다 세분화된 취향을 반영한 니치 마켓(틈새시장)을 좋아한다. 콘텐츠를 갖춘 소상공인은 새로운 시대에 오히려 더 경쟁력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몰리는 제주 월정리 카페거리나 양양의 서퍼비치도 처음엔 재미있는 발상과 젊은 감각을 가진 소상공인 한둘로 시작됐었다. 자발적으로 자리 잡은 소상공인들이 저마다의 스토리와 개성을 담은 작고 특별한 가게를 선보이고, 그렇게 하나둘 생긴 동네 핫플레이스가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지역’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근사한 변화가 있을까. 코로나19란 극한 여건 속에서 젊은 소상공인들이 낸 성과를 가볍게 흘려 볼 수 없는 이유다.



박선희 산업2부 차장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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