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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금융비밀주의의 終焉[기고/임광현]

임광현 국세청 차장
입력 2022-01-19 03:00업데이트 2022-01-19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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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광현 국세청 차장
#-1 성형외과 병원장 A 씨는 성형의료 해외 출장을 통해 외국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파나마, 키프로스 등 정부의 손길이 닿기 힘든 조세회피처 곳곳에 개설한 금융계좌에 나눠 은닉했다. 그러나 2020년에 국가 간 금융정보 교환을 통해 A 씨의 해외 계좌정보가 한국에 통보되면서 그는 수십억 원의 해외금융계좌 미신고 과태료와 세금을 추징당했다.

#-2
기업가 B 씨는 기업승계자금 등을 자녀에게 몰래 마련해주기 위해 스위스 은행의 상담을 받고, 계좌주 이름이 영문과 숫자의 조합(예: blackdiamond119)으로 표기돼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이른바 ‘숫자계좌’를 개설했다. 그러나 정부가 스위스 국세청과의 공조를 통해 숫자계좌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되면서 B 씨는 현재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3 유명 기업가 C 씨는 수십억 원의 국내 재산을 일단 본인의 해외계좌로 송금하고, 이를 해외에 있는 자녀가 인출하는 방식으로 미국 베벌리힐스 등에 고급 주택을 구입했다. 국세청은 미 과세 당국과의 정보교환을 통해 수억 원의 증여세를 추징했다.

최근 국세청이 외국 정부와의 정보공조를 통해 역외탈세 혐의자를 적발한 사례들이다. 자국 법원의 소환장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고객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금융기관의 운영 방식을 뜻하는 금융비밀주의에 기대어, 과거 각국 자산가들은 역외은행의 비밀계좌에 ‘이름표 없는(nameless)’ 돈을 숨겨두고 과세 당국의 감시와 세금을 피해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노력으로 비밀계좌에 대한 빗장풀기가 이루어지면서 이른바 ‘금융비밀주의 종언(終焉)’ 시대가 온 것이다.

국세청은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와 조세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양자 또는 다자 간 정보교환이 가능한 국가는 152개국에 달한다. 그동안 역외 현금지급기(ATM) 역할을 했지만 철통같은 금융비밀주의로 인해 접근하지 못했던 스위스,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이고 케이맨, 몰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의 금융계좌 정보도 정기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강화된 국제공조 네트워크를 통해, 실명을 쓰지 않고 계좌주 이름이 숫자와 문자로 표시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숫자계좌’의 실제 소유주와 은닉된 거래정보를 확보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금융정보뿐만 아니라 해외부동산 보유 정보, 외국환 거래자료, 해외 소득자료 등도 납세자별로 관리해 나갈 계획이다.

디지털 경제의 성장과 함께 가상화폐를 비롯한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를 활용한 신종 역외탈세 수법 개발과 재산 은닉 시도도 계속될 것임을 잘 안다. 또 두둑한 보수를 받고 고객에게 정부 감시를 피할 ‘투명망토(cloak of invisibility)’를 마련해주는 어둠의 역외탈세 공급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금융비밀주의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린 것처럼, 국세청은 국제사회와 공조해 역외탈세에 단호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다. 누구나 가진 소득과 재산에 따라 정당한 세금을 내야 한다는 조세정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임광현 국세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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